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670)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이 부활이다/ 손용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1. 11:37

본문

 

(670)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이 부활이다/ 손용환 신부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 토마스의 불신
발행일 : 2010-04-11 [제2692호, 10면]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는 17세기 회화세계에 혁신을 일으킨 화가입니다. 그는 바로크시대의 대표적 화가로서 빛을 그림에 접목한 사람입니다. 그는 종교적인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성화의 소재를 대부분 거리의 서민들에게서 취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성화는 늘 친숙합니다.

그가 그린 <토마스의 불신>도 우리의 의문을 친숙하게 대변해 줍니다. 이 성화의 배경은 요한복음 20장 19~31절입니다.

토마스는 그날 저녁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는 그 중요한 저녁, 예수님께서 성령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시던 그 저녁에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토마스는 왜 거기에 없었을까요? 그는 더 이상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희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실망해버렸습니다. 그는 그가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았던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뵈었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우리도 토마스처럼 행동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속에 감추어진 그 너머의 것을 보지 못한 채, 자기 시야를 좁혀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도 토마스의 세계에 빠져 그저 먹고, 즐기고, 짝 짓고, 의미 없는 잡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토마스와 같은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이 성화에는 등장인물이 네 명 나옵니다. 예수님은 황금분할선상에 자리 잡고 있고, 세 제자들이 오른쪽에서 예수님을 향해 다가섭니다. 그리고 의심하는 토마스의 머리와 다른 제자들의 머리가 정확히 중심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토마스의 손가락에 모아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두 손 사이에 토마스의 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손으로 옷자락을 걷고, 다른 한 손으로는 토마스의 손목을 붙잡아 상처의 갈라진 부분으로 당기고 있습니다. 그 손등에는 못 자국도 또렷하게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토마스는 자기 손가락으로 예수님의 상처를 헤집는 동안 다른 제자들도 눈으로 상처를 더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촉각과 느낌으로 그분의 상처를 더듬고 있습니다.

토마스는 그분을 보았고, 그분을 만졌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그는 그렇게 고백함으로써 자기 주위를 둘러쳤던 불신의 테두리를 무너트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보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까?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확인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보이지 않은 가능성까지 믿어 주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보지 않고도 믿어줄 때 부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야 믿겠다고 할 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의심만 남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행복이 그리운 오늘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이 부활이라는 말씀이 뇌리에 머무는 오늘입니다.


토마스의 불신, 카라바조 作(1601-1602).
손용환 신부 (군종교구 쌍용본당 주임)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