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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3) 자비를 베푼 사람이 이웃입니다/ 손용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1.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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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3) 자비를 베푼 사람이 이웃입니다/ 손용환 신부

연중 제15주일 (루카 10,25-37) :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발행일 : 2010-07-11 [제2705호, 10면]

-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야코포 바사노 作(1592).
야코포 바사노(Jacopo Bassano, 1510-1592)는 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베네치아파 화가입니다. 그는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고, 그의 네 아들도 모두 화가였습니다. 그가 그린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루카복음서 10장 25-37절이 그 배경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예수님께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 그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되물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예수님께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이다.”(루카 10,37) 그래서 이 성화는 누가 참 이웃인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 성화에는 네 명의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그중 두 사람은 전면에 크게 묘사되어 있고, 나머지 두 사람은 후면에 작게 뒷모습만 그려져 있습니다. 크게 그려진 두 사람이 바로 중심인물입니다. 한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착한 사마리아인입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알몸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그의 머리와 발에는 피가 흐릅니다. 그는 머리에 천을 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빛을 가장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처 입은 사람이 바로 우리 곁에 계시는 예수님임을 암시하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처럼 알몸에 수건만 걸치고 있고, 머리에 감은 천의 모양도 가시관 같습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을 부축하는 사람이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은 서로 적대관계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강도를 만난 유다인을 도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원수까지도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마라아인을 착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그의 옷 색깔은 사랑을 상징하는 붉은색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리는 제자처럼 강도를 당한 사람을 정성스럽게 모시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상처 입은 사람을 여관에 모실 작정입니다. 그런데 왜 그의 허리에는 단검이 있을까요? 그것은 원수관계였던 유다인을 칼이 아닌 사랑으로 대접하는 그의 행동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로써 착한 사마리아인은 참 이웃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동족인 후면의 두 사람은 그를 보고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립니다. 그 두 사람은 가장 거룩해야 할 사제와 레위인입니다. 그들은 두루마리 성경을 품에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가는 성경만을 품에 간직하고 있는 그들의 행동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사제와 레위인은 이슬처럼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옷 색깔 역시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색입니다.

그런데 후각이 발달된 개 두 마리가 강도를 당한 사람의 피를 핥고 있고, 노새 한 마리가 그를 실어 나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를 빨아 먹는 개 두 마리가 유다인이고, 예수님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노새 한 마리가 사마리아인임을 암시하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쳐지나간 유다인은 이슬처럼 사라지고,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이웃이 되어 준 이방인들이 새로운 교회의 주인이 됨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세례 때 쓰이는 기름병이 눈에 띄게 놓여 있습니다. 기름은 상처를 싸매 주기도 하고, 구원을 상징이기도 하니까요.

우리도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간결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면 누가 이웃일까요? 자비를 베푼 사람이 이웃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새로운 교회의 주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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