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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 참전 카폰 美신부, 61년만에 명예훈장 추서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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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巡禮者 2012. 4. 19.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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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한국, 짐승이 되어버린 사람들 속…

 

그는 전장의 예수였다

 

 

 
 한국전 참전 카폰 美신부, 61년만에 명예훈장 추서 추진

6·25전쟁에 참전한 에밀 카폰 신부가 전장의 한 벌판에서 군용 지프에 간이 제대를 꾸려놓고 병사들과 미사를 드리고 있다. BBC

 

 

 

6·25전쟁에 참전해 밤마다 참호에서 패닉 상태에 빠진 동료들의 손을 붙잡고 기도해 주던 군종신부(軍宗神父)가 있었다. 그는 안전한 후방 전선을 선택할 수도, 전선에서 후퇴할 수도 있었지만 끝까지 남아 다친 동료들을 돌봤고, 포로수용소에서도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하다 이국땅에서 숨을 거뒀다.

미 육군 에밀 카폰 신부(1916∼1951) 이야기다. 그에게 사후 61년 만에 미 군인에게 주는 최고 훈장인 ‘명예 훈장(medal of honor)’을 추서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으며, 가톨릭계에서는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영국 BBC방송이 16일 보도했다.

1916년 캔자스 주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40년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6·25전쟁이 터진 직후인 1950년 7월 미 육군 제8기병 연대 소속으로 한국에 온 뒤 군인들과 함께 북상했다. 동료들은 카폰 신부가 쾌활한 성품이며 어린 군인들을 진심으로 돌보는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1950년 8월엔 교전지에서 부상병을 구출해 동성(銅星)훈장을 받았다.

그러다 그해 11월 2일 원산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됐다. 카폰 신부는 철수하라는 지시를 거부하고 통나무와 지푸라기로 참호를 만들어 부상병들을 대피시켰다. “그는 당시 몇 차례나 빠져나갈 기회가 있었지만 그런 기회를 잡지 않았다”는 게 동료 병사들의 회고다.

포로가 된 뒤 수백 명의 미군 포로들과 함께 중공군이 관할하던 평안북도 벽동 수용소 마을로 보내진 카폰 신부는 인근 중국 상점을 오가며 감자와 소금, 곡물 등을 훔쳐 동료들에게 주고 부상자들의 옷을 빨며 수발을 도맡았다. 당시 함께 수용소에 수감돼 있었던 생존자는 “음식이 부족해 포로들이 짐승처럼 변할 때도 그는 인간성을 지키며 이상적인 성품을 유지했다”고 증언했다.

결국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1951년, 다리에 혈전이 생겨 절기 시작했고 한쪽 눈이 세균에 감염돼 늘 헝겊을 대고 다녀야 했다. 이질과 폐렴에 시달리던 그는 그해 5월 말 수용소에서 숨을 거뒀다. 나이 35세였다. 동료 펠릭스 매콜 씨는 “신부는 죽기 직전까지 동료들의 고해성사를 들었고, 죽는 순간 ‘곧 신이 계신 곳으로 가기 때문에 기쁘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카폰 신부가 중공군에게 포위됐을 때 부상병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군은 그의 사망 직후 육군훈장 중 두 번째로 높은 수훈십자훈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을 추서했다. 하지만 그가 수용소에 갇힌 뒤 실천한 희생과 박애의 행동은 포로들이 석방된 1953년까지 알려질 길이 없었다.

미국 법에 따르면 명예훈장은 해당 행위가 이뤄진 시점을 기준으로 2년 내 대통령에게 품신돼 3년 내 수여하게 돼 있다. 그러나 최근 카폰 신부의 선행을 전해들은 캔자스 주 출신 의원들이 카폰 신부에 대해 예외를 인정해 달라고 요청해 지난해 12월 예외로 인정됐다. 의원들은 1월 리언 패네타 미국 국방장관에게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훈장 추서를 건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명예훈장이 추서되면 이 훈장을 받은 미군 3458명 중 다섯 번째로 훈장을 받는 가톨릭 사제가 된다.

바티칸은 성인 추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공식 조사에 들어갔다. 만약 성인 반열에 오르면 그는 미군 중 최초의 성인이 된다. 존 호츠 신부는 “그는 동료 수감자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본보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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