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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제8회 잉글랜드 월드컵

스포츠/월드컵

by 巡禮者 2011. 5. 1.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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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1966년 월드컵은 유럽의 잉글랜드에서 7월 11일부터 7월 30일까지 총 20일간 치러졌다. 이 대회는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에서 치러진 역사상 유일무이한 월드컵인 동시에, 사상 처음으로 백만 관중을 돌파하며 엄청난 흥행을 거둔 대회로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경기 내용 면에서는 1962년 대회부터 시작된 유럽과 남미 간의 거친 감정 다툼이 반복되는 등 질적으로 그리 향상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러한 와중에 개최국 잉글랜드는 사상 첫 우승을 차지하는 성공을 이뤄냈으며, 북한 역시 아무도 예상치 못한 8강 돌풍을 일으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개최국과 대회기간: 잉글랜드, 1966년 7월 11일~7월 30일
참가국: 16개국
총 득점: 32경기 89골, 평균 2.78
총 관중: 1,635,000명, 평균 51,094
우승국: 잉글랜드(통산 1회)

 

 

지역예선

개최국 잉글랜드와 전 대회 우승국 브라질을 제외한 총 74개국이 14장의 본선 진출 티켓을 놓고 다퉜다. 그러나 제 3 대륙에 해당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팀들의 계속되는 기권은 피파 측에 변함없는 골칫거리를 제공했다.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은 불과 1장의 티켓을 따내기 위해 홈&어웨이 방식으로 많은 경기를 소화해야 하는 기존의 방식에 일제히 불만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예선을 소화하기 위한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고, 본선 진출 가능성도 극히 희박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시아의 대한민국과 일본, 그리고 아프리카 국가들은 연달아 지역예선을 보이콧 했다. 결국 아시아•아프리카 그룹에서는 북한과 호주만이 남아 플레이오프 형식으로 본선 진출 팀을 가려야 했는데, 북한은 종합 스코어 9-2로 호주를 가볍게 제압하고 사상 처음으로 본선 행 티켓을 거머쥐는 기쁨을 누렸다. 한편 영국에 포함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 등은 지역예선 통과에 실패함에 따라 종주국에서 열리는 첫 번째 월드컵에 일제히 참가하지 못했다. 반면 에우제비우와 콜루나 등을 앞세운 포르투갈은 역대 최강의 전력을 구축, 전 대회 준우승국 체코를 떨어뜨리고 본선에 합류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룹 대륙 티켓 예선참가국 본선진출국
1 유럽 1 불가리아, 벨기에, 이스라엘 불가리아
2 유럽 1 서독, 스웨덴, 키프러스 서독
3 유럽 1 프랑스, 노르웨이, 유고, 룩셈부르크 프랑스
4 유럽 1 포르투갈, 체코, 루마니아, 터키 포르투갈
5 유럽 1 스위스, 북아일랜드, 네덜란드, 알바니아 스위스
6 유럽 1 헝가리, 동독, 오스트리아 헝가리
7 유럽 1 소련, 웨일즈, 그리스, 덴마크 소련
8 유럽 1 이탈리아, 스코틀랜드, 폴란드, 핀란드 이탈리아
9 유럽 1 스페인, 아일랜드 스페인
10 남미 1 우루과이, 페루, 베네수엘라 우루과이
11 남미 1 칠레, 에콰도르, 콜롬비아 칠레
12 남미 1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13 북중미 1 최종예선: 멕시코, 코스타리카, 자메이카 멕시코
14 아시아•아프리카 1 최종 플레이오프: 북한, 호주
아프리카 팀들 기권
북한

 

 

본선 요약

지난 1962년 대회와 마찬가지로 출전 16개국을 4개 조로 편성하여 조별리그를 치르게 한 뒤 8강부터 토너먼트 제를 도입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조별리그에서 일어난 최대 이변은 브라질,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로 이어지는 우승후보 4개국의 탈락이었다. 특히 1958년 대회와 1962년 대회를 2연패하며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으로 떠오른 브라질의 조별리그 탈락은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대형 사건으로 손꼽힌다. 브라질은 유럽 국가들의 거친 파울과 수비에 고전을 면치 못했을 뿐 아니라, 펠레가 헝가리 전 도중 부상으로 쓰러진 것이 치명타로 작용했다. 1962년 대회를 휩쓸었던 가린샤 역시 계속되는 부상 및 자기관리 실패로 인해 전성기가 한참 지나간 상태였다. 이탈리아 역시 북한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며 두 대회 연속 조별리그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수모를 당했다.

 

반면 개최국 잉글랜드는 초반부터 순항을 거듭했다. 우루과이, 아르헨티나와 같은 남미 국가들과 거의 난투극에 가까운 경기를 펼치며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바비 찰튼을 중심으로 단단하게 뭉친 팀 조직력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수준에 올라 있었다. 에우제비우가 이끄는 포르투갈과 베켄바워의 서독을 연달아 격침시킨 잉글랜드는 결국 꿈에 그리던 월드컵 첫 우승의 영광을 차지했다. 그러나 결승전에서 오심의 희생양으로 떠오른 서독은 잉글랜드의 우승을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실제로 서독과의 결승 연장전에서 허스트가 성공시킨 결승골은 사실 골라인을 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됐으며, 이는 1986년 월드컵에서 일어난 마라도나의 ‘신의 손 사건’과 함께 역대 최악의 오심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 밖에 1966년 대회는 지난 1962년 대회의 수비적이고 거친 성향을 고스란히 반영, 총 32경기에서 고작 89골이 터져 나오는 골 가뭄으로 팬들을 실망시켰다. 특히 우승팀 잉글랜드는 서독과의 결승전이 치러지기 전까지 5경기 1실점만을 기록하는 철벽수비를 과시했는데, 이러한 승리 지향주의 축구는 우승에 목말라 있던 잉글랜드 국민 전체의 의지를 반영한 결과였다. 반면 포르투갈은 잉글랜드와 반대되는 화려한 공격축구를 선보여 ‘유럽의 브라질’이란 호평을 받았다.

 

 

주요 선수

1966년 월드컵을 빛낸 최고의 선수는 잉글랜드를 우승으로 이끈 바비 찰튼이었다. 팀 전체를 이끄는 리더로서 ‘조용한 카리스마’를 선보인 찰튼은 그라운드 위에서도 풍부한 활동량, 날카로운 양발 슈팅, 탁월한 경기운영 능력을 앞세워 잉글랜드를 사상 첫 우승으로 이끌었다. 찰튼과 함께 수비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한 보비 무어와 골키퍼 고든 뱅크스의 활약도 매우 돋보였다는 호평을 받았다.

 

9골로 득점왕을 차지한 포르투갈의 에우제비우는 이 대회에서 찰튼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한 스타 공격수였다. 에우제비우는 브라질과의 조별리그 경기에서 펠레를 상대로 KO승을 거뒀을 뿐 아니라, 북한과의 8강전에서는 혼자 4골을 폭발시키며 0-3 경기를 5-3으로 뒤집어놓는 괴력을 발휘했다. 에우제비우와 함께 미드필드진에서 천부적인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선보인 마리오 콜루나 역시 이 대회를 통해 스타덤에 올랐다. 서독의 프란츠 베켄바워 또한 이 대회를 통해 월드컵 데뷔 무대를 가졌다. 약관 20세의 나이로 비범한 재능과 리더십을 선보인 베켄바워는 공격수 우베 젤러와 함께 서독 결승진출의 일등공신 역할을 해냈다. 지난 1962년 대회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던 골키퍼 레프 야신 역시 이 대회에서는 신들린 듯한 선방을 연발하며 소련의 4강 진출에 크게 공헌했다. 당시 야신의 나이는 만으로 36세였다.

 

그 밖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8강 돌풍을 일으킨 북한에서는 박두익이 ‘동양의 펠레’로 불리며 현지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폭발적인 스피드와 골 결정력을 앞세워 북한 역습축구의 선봉장 역할을 수행했던 박두익은 특히 이탈리아전에서 터뜨린 결승골로 스타덤에 올랐다. 반면 유로 1964 우승팀 스페인의 주축 선수들인 아만시오, 루이스 수아레스, 프란시스코 헨토 등은 별다른 활약을 선보이지 못한 채 조별리그 무대에서 쓸쓸히 자취를 감췄다.

 

 

수상 기록

MVP
1위 바비 찰튼(잉글랜드)
2위 바비 무어(잉글랜드)
3위 에우제비우(포르투갈)

 

득점
1위 에우제비우(포르투갈/9골)
2위 헬무트 할러(서독/6골)
3위 제프 허스트(잉글랜드/4골), 프란츠 베켄바워(서독/4골) 외 2명.

 

베스트 팀
골키퍼: 고든 뱅크스(잉글랜드).
수비수: 조지 코헨, 바비 무어(이상 잉글랜드), 비센테(포르투갈), 실비오 마르솔리니(아르헨티나).
미드필더: 프란츠 베켄바워(서독), 마리오 콜루나(포르투갈), 바비 찰튼(잉글랜드).
공격수: 플로리안 알베르트(헝가리), 우베 젤러(서독), 에우제비우(포르투갈).

 

 

잉글랜드 월드컵 이모저모

01

잉글랜드는 축구 종주국답게 백만 관중을 가볍게 돌파(총 163만명 동원)하는 한편, 세계 29개국으로 위성 TV 중계를 실시하는 등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스케일을 과시하며 1966년 대회를 크게 흥행시켰다.

02

전 대회 우승국 브라질의 조별리그 탈락은 1966년 대회에서 일어난 최대 이변이자 사건이었다. 유럽 팀들의 거친 파울에 고전을 면치 못한 브라질 선수들은 “역대 최악의 월드컵” 이라며 1966년 대회 자체를 비아냥거렸고, 특히 부상으로 쓰러진 펠레는 “유럽 선수들은 풋볼이 아닌 풋복싱을 하길 원한다. 두 번 다시 월드컵에 참가하는 일은 없을 것” 이라며 사실상 월드컵 은퇴를 선언했다.

03

참고로 전 대회 우승국의 조별리그 탈락은 월드컵 역사상 세 번밖에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1966년 대회의 브라질과 함께 50년 대회의 이탈리아(1938년 챔피언), 2002년 대회의 프랑스(1998년 챔피언)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04

지난 1962년 대회부터 시작된 유럽과 남미 간의 감정 다툼도 변함없이 격렬한 양상을 나타냈다. 잉글랜드 선수들이 우루과이와의 첫 경기에서 거친 반칙에 고전한 것을 시작으로, 펠레와 브라질 동료들은 거침없는 유럽 선수들의 태클에 부상으로 쓰러졌으며, 서독 선수들도 우루과이와의 8강전에서 급소를 걷어차이는 등의 몰상식한 반칙을 당했다.

05

이러한 양 대륙 간의 감정 다툼은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8강전에 이르러 절정으로 달했다. 사건의 발단은 서독 출신의 크라이틀라인 주심이 아르헨티나 주장 라틴을 갑작스레 퇴장시킨 것에서부터 비롯됐다. 스페인어를 몰랐던 크라이틀라인 주심은 라틴의 항의를 자신에 대한 욕설로 간주했지만, 영문조차 모르고 퇴장 명령을 받은 라틴은 경기장을 떠나지 않은 채 주심의 판정에 불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06

라틴이 퇴장을 인정하지 않자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고, 경기 분위기는 점차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잉글랜드는 가까스로 1-0 승리를 거뒀지만, 패배에 분노한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라커룸을 발로 걷어차는 등 경기가 끝난 뒤에도 거칠게 난동을 부렸다. 이에 램지 감독은 아르헨티나 선수들을 ‘짐승들(Animals)’이라 비난하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07

이 ‘애니멀 발언’은 추후 아르헨티나에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아르헨티나 언론들은 “잉글랜드가 심판을 사들여 승리를 도둑질해갔다” 며 강도 높은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오늘날에 이르러 1966년 대회 8강전에서 일어난 라틴 퇴장 사건은 잉글랜드-아르헨티나 라이벌 역사의 출발점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08

피파는 두 대회 연속으로 거친 반칙이 난무함에 따라 그 대비책 마련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그 결과 피파는 옐로우카드-레드카드 시스템을 마련, 1970년 대회부터 경고 1회를 받은 선수가 2회 누적으로 퇴장을 당하는 규정을 처음으로 적용시켰다.

09

또한 피파는 선수교체 제도에 관해서도 재검토를 실시하여 1970년 대회부터 적용시키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 규정이 도입된 결정적 계기는 1966년 대회 최대 이변으로 손꼽히는 북한-이탈리아 경기 때문이었다. 이 경기에서 이탈리아는 미드필더 불가렐리가 부상으로 실려나간 뒤 10명으로 싸워야 했고, 결국에는 0-1 패배까지 당했다. 피파는 이와 같은 사례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1970년 대회부터 선수교체 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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