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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제7회 칠레 월드컵

스포츠/월드컵

by 巡禮者 2011. 5. 1.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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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1962년 월드컵은 남미의 칠레에서 5월 30일부터 6월 17일까지 총 19일간 치러졌다. 칠레는 라이벌 아르헨티나를 따돌리고 1962년 대회 개최국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지만, 개막 2년 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인해 준비과정 내내 엄청난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 과정이 파란만장했던 만큼 칠레 국민들은 뜨거운 축구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홈 관중들의 성원에 힘입어 결국에는 4강까지 오르는 이변을 연출해낼 수 있었다. 브라질 역시 펠레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대회 2연패를 달성, 남미세가 유럽세를 압도한 것이 1962년 대회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개최국과 대회기간: 칠레, 1962년 5월 30일~6월 17일
참가국: 16개국
총 득점: 32경기 89골, 평균 2.78
총 관중: 899,074명, 평균 28,096
우승국: 브라질(통산 2회)

 

 

지역예선

피파는 1962년 대회에 이르러 기존의 지역예선 시스템에 다소간의 수정을 가했다. 자동 출전권을 부여받은 전 대회 우승국 브라질과 개최국 칠레가 모두 남미 소속 국가였던 만큼, 유럽 국가들이 남미의 티켓 수를 줄이는 대신 유럽 측에 배정된 10장의 티켓 수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미 측에서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결국 피파는 유럽과 남미 측에 불이익을 주지 않기 위해 ‘제3 대륙의 희생’을 해답으로 내놓았다. 그 결과 북중미, 아프리카, 아시아 국가들은 모두 0.5장의 티켓을 부여받는 한편, 예선을 통과하더라도 유럽 및 남미 국가들과 플레이오프를 치러야만 했다. 이러한 시스템 수정은 곧바로 아시아 및 아프리카 국가들의 희생으로 이어졌다. 북중미의 멕시코가 남미의 파라과이를 따돌리고 간신히 본선에 합류한 반면, 아시아의 대한민국과 아프리카의 모로코는 유럽의 유고와 스페인에 가로막혀 본선으로 향할 수 없었다.

 

이러한 지역예선 시스템은 1962년 대회를 진정한 의미의 세계선수권대회가 아닌 유럽-남미 대항전으로 변질되도록 만들었다. 출전 16개국이 모두 유럽과 중남미 국가들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월드컵의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의 불참은 대회 전체의 질적 수준 향상으로 이어질 것이란 긍정적인 평가도 흘러나왔다. 그만큼 제3 대륙 국가들은 세계 축구와의 수준 차로 인해 여러모로 냉랭한 대우를 받아야만 했다.

 

그룹 대륙 티켓 예선참가국 본선진출국
1 유럽 1 스위스, 스웨덴, 벨기에 스위스
2 유럽 1 불가리아, 프랑스, 핀란드 불가리아
3 유럽 1 서독, 북아일랜드, 그리스 서독
4 유럽 1 헝가리, 네덜란드, 동독 헝가리
5 유럽 1 소련, 터키, 노르웨이 소련
6 유럽 1 잉글랜드, 포르투갈, 룩셈부르크 잉글랜드
7 유럽 1 이스라엘, 키프러스, 이탈리아, 루마니아 이탈리아
8 유럽 1 체코,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체코
9 유럽 0.5 스페인, 웨일즈
플레이오프: 모로코 0-1 스페인, 스페인 3-2 모로코.
스페인
10 유럽 0.5 유고, 폴란드
플레이오프: 유고 5-1 대한민국, 대한민국 1-3 유고
유고
11 남미 1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12 남미 1 우루과이, 볼리비아 우루과이
13 남미 1 콜롬비아, 페루 콜롬비아
14 북중미 0.5 최종예선: 멕시코, 코스타리카, 네덜란드령 앤틸리스
플레이오프: 멕시코 1-0 파라과이, 파라과이 0-0 멕시코
멕시코
15 아프리카 0.5 최종예선: 모로코, 튀니지, 가나, 나이지리아
플레이오프: 모로코 0-1 스페인, 스페인 3-2 모로코.
-
16 아시아 0.5 최종예선: 한국, 일본, 인도네시아(기권)
플레이오프: 유고 5-1 대한민국, 대한민국 1-3 유고
멕시코

 

 

본선 요약

1962년 월드컵은 조별리그 진행방식에 있어 유의미한 발전 및 변화가 일어난 대회였다. 우선 피파는 각 조의 2, 3위 팀이 승점 동률을 기록할 경우 플레이오프 형태의 재경기를 치르는 기존 제도를 과감히 폐지했다. 그 대신 두 팀의 한 경기당 평균 득점률을 비교하는 새로운 판정기준을 도입했는데, 이 기준은 1970년 대회에 이르러 오늘날의 득실차 제도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시스템 변경에 가장 먼저 희생된 국가는 남미의 강호 아르헨티나였다. D조에 소속된 아르헨티나는 1승 1무 1패로 잉글랜드와 동률을 이뤘음에도 불구, 평균 득점률에서 밀려 조별리그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당시로써는 생소했던 이 판정기준에 아르헨티나는 불만을 표출했고, 크고 작은 논란도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한편 1962년 월드컵 최강의 우승후보로는 대회 개막 전부터 일제히 브라질이 지목됐다. 펠레가 한층 성숙해진 기량을 과시하며 절정에 도달해 있었을 뿐 아니라, 1958년 대회 우승팀의 골격이 고스란히 유지되는 등 브라질은 조직력 면에서도 다른 팀들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브라질의 대항마로는 유럽의 스타군단 스페인과 이탈리아, 그리고 1960년 유럽선수권대회 우승팀 소련 등이 손꼽혔다. 그러나 디 스테파노가 부상으로 빠진 스페인은 브라질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탈리아 역시 개최국 칠레와 ‘산티아고의 난투극’을 벌인 끝에 조별리그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반면 브라질은 대회 초반 펠레가 부상으로 쓰러졌음에도 불구, 탄탄한 조직력과 가린샤의 활약을 앞세워 별다른 문제없이 1962년 대회 정상에 올랐다. 이는 1934년, 1938년 대회를 연패한 이탈리아 이후 24년 만에 탄생한 월드컵 2연패 기록이었다.

 

 

 

 

주요 선수

1962년 월드컵은 ‘가린샤의 대회’로 역사 속에 기억되고 있다. 가린샤는 멈춰 세울 수 없는 드리블 돌파와 강력한 오른발 슈팅을 앞세워 대회 내내 상대 팀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했고, 부상으로 쓰러진 펠레를 대신하여 세계 최고의 선수로 떠올랐다. 펠레의 부상 공백을 무난히 대체한 후보 공격수 아마리우두, 플레이메이커 디디, 우측 수비수 자우마 산토스 등도 가린샤와 함께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끈 대표적인 주역 선수들이었다.

 

준우승팀 체코에서는 주장이자 플레이메이커 요세프 마소푸스트의 활약이 단연 돋보였다. 마소푸스트는 타고난 리더십과 날카로운 패스, 그리고 과감한 드리블 돌파 능력을 선보여 이 대회에서 크게 주목받았는데, 특히 역동적인 전진 돌파에는 ‘마소푸스트 직활강’이란 수식어가 따로 사용될 정도였다. 골키퍼 쉬로이프 또한 이 대회에서 부진했던 야신을 누르고 유럽 넘버원이란 칭호를 받아낸 체코 대표팀의 든든한 대들보였다.

 

그 밖에 개최국 칠레에서는 레오넬 산체스가 화끈한 공격력을 발휘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고, 절묘한 개인기와 슈팅 기술을 선보인 유고의 드라찬 예르코비치, 헝가리의 플로리안 알베르트 등도 축구팬들의 두 눈을 즐겁게 했다. 반면 스페인 대표팀의 유니폼을 입고 1962년 대회에 참가한 페렌츠 푸스카스는 좀처럼 이름값을 해내지 못했으며, 비교적 분투한 프란시스코 헨토의 활약도 스페인의 조별리그 탈락으로 인해 빛이 바랬다.

 

 

수상 기록

MVP
1위 가린샤(브라질)
2위 요세프 마소푸스트(체코)
3위 레오넬 산체스(칠레)

 

득점

1위 가린샤, 바바(이상 브라질/4골), 레오넬 산체스(칠레/4골), 드라찬 예르코비치(유고/4골), 발렌틴 이바노프(소련/4골), 플로리안 알베르트(헝가리/4골)
7위 아마리우두(브라질/3골) 외 3명.

 

베스트 팀
골키퍼: 빌리암 쉬로이프(체코).
수비수: 자우마 산토스(브라질), 체자레 말디니(이탈리아), 발레리 보로닌(소련), 칼-하인츠 슈넬링거(서독).
미드필더: 지투(브라질), 요세프 마소푸스트(체코).
공격수: 바바, 가린샤, 아마리우두(이상 브라질), 레오넬 산체스(칠레).

 

 

칠레 월드컵 이모저모

01

1962년 대회 개막을 앞두고 칠레에서 일어난 지진은 ‘20세기 최악의 대지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지진은 1960년 5월에 칠레 전 국토에 걸쳐 발생했는데, 그 진도는 무려 9.5에 달했고 인명피해 또한 5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정도로 막대했다.

02

칠레는 이 대지진으로 인해 1962년 대회 준비과정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국가의 존폐여부 자체를 의심받았다. 그로 인해 피파는 칠레의 1962년 대회 개최를 재검토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에 칠레 축구 협회장 디트보른은 “우리는 지진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월드컵 하나뿐인데 그것마저 빼앗아가려 하는가” 라는 눈물겨운 외침으로 피파 측의 마음을 돌렸다.

03

칠레는 1962년 대회 개최권을 지켜낸 이후 시설 복구, 경기장 신축 등의 준비 작업을 범국가적으로 진행시켰다. 이러한 대규모 작업은 칠레 축구협회장 디트보른의 주도하에 이루어졌고, 칠레는 가까스로 월드컵 준비를 끝마칠 수 있었다.

04

매우 안타깝게도, 디트보른 협회장은 월드컵 개막을 한 달 앞둔 1962년 4월 28일에 세상을 떠났다. 칠레는 디트보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아리카 경기장의 이름을 ‘카를로스 디트보른 스타디움’으로 공식 변경했다.

05

1962년 대회는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던 지난 1958년 대회와 다르게 유럽과 남미의 신경전이 극에 달했던 대회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개최국 칠레와 이탈리아의 조별리그 경기에서는 양 팀 선수들의 거친 반칙과 주먹다짐이 90분 내내 난무했을 정도였다. ‘산티아고의 난투극’으로 불리는 이 맞대결은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경기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06

전설의 산티아고 난투극은 이탈리아의 한 기자가 쓴 공격적인 기사로부터 출발한다. 현지에 도착한 이탈리아 기자는 “칠레와 같은 나라에서 월드컵을 개최하는 것은 미친 짓”이란 표현을 서슴지 않았고, 이 소식을 접한 칠레 측이 분노를 삭이지 못해 이탈리아 기자들을 모두 추방하려 한 것이다. 그 결과 양 국 선수들은 감정이 극히 악화된 채로 경기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07

경기 시작 전부터 난투극을 예상한 이탈리아의 마짜 감독은 유약한 스타일의 시보리와 리베라를 선발 명단에서 과감히 제외시켜버렸다. 마짜 감독의 예상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양 팀 선수들은 경기 시작부터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거친 파울을 주고받았고, 이탈리아의 페리니는 전반 7분 만에 퇴장을 당한 뒤 경기장을 떠나지 않고 칠레 선수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좋지 못한 모습을 연출했다.

08

칠레에 패한 이탈리아는 결국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당했다. 시보리와 마스키오를 비롯한 이민계 선수들을 4명이나 귀화시키는 한편, 의사, 유명 요리사, 마사지 전문사, 심리학자 등의 특별 스탭까지 구성하여 1962년 대회를 준비한 것 치고는 너무나 초라한 성적표가 아닐 수 없었다. 이탈리아는 탈락 이후에도 개최국 칠레를 강도 높게 비난하며 서로간의 감정을 악화시켰다.

09

이렇게 시작된 남미와 유럽간의 전쟁 분위기는 1962년 대회 내내 지속됐으며, 선수들의 계속되는 거친 반칙은 대회의 질적 수준을 크게 떨어뜨리고 말았다. 대회 전체 득점 역시 전 대회에 비해 37골이나 줄어들었는데, 이에 유럽 언론들은 1962년 대회를 “몰상식한 반칙이 난무하는 역대 최악의 월드컵”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09

이처럼 험악해진 분위기 속에서도 개최국 칠레는 4강 신화를 달성하는 성과를 남겼다. 특히 칠레 홈 관중들의 뜨거운 응원 열기는 아직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을 정도다. 경기장 전체에 울려 퍼진 칠레 국민들의 응원구호 “칠~칠~레~레~칠레~칠레~비바 칠레!” 또한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09

한편 역대 최고의 골키퍼로 추앙받는 레프 야신은 이 대회에서 실수를 연발하며 자존심을 구길 대로 구겼다. 콜롬비아와의 조별리그 경기에서는 월드컵 역사상 유일무이한 ‘올림픽 골’까지 내주는 수모를 당했는데, 야신을 상대로 역사적인 골을 성공시킨 주인공은 콜롬비아 미드필더 마르코스 콜이었다.

09

‘올림픽 골’이란 코너킥으로 직접 득점을 뽑아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1924년 올림픽 당시 아르헨티나의 세자레오 온사리가 우루과이를 상대로 성공시킨 코너킥 득점이 ‘올림픽 골’의 기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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