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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제10회 서독 월드컵

스포츠/월드컵

by 巡禮者 2011. 5. 1.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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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1974년 월드컵은 유럽의 서독에서 6월 13일부터 7월 7일까지 총 25일간 치러졌다. 1974년 월드컵은 네덜란드가 토털풋볼을 세계무대에 처음으로 선보이며 크게 주목받았던 대회인 동시에, 그 네덜란드가 최강의 전력에도 불구하고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대회로 기억되고 있다. 또한 1974년 대회에서는 브라질에게 영구 소유권이 넘어간 줄리메컵 대신 오늘날의 피파컵이 우승팀에게 수여되기 시작했으며, 대회 명칭 또한 ‘줄리메컵 세계축구선수권대회’에서 ‘피파 월드컵’으로 정식 변경됐다.

 

개최국과 대회기간: 서독, 1974년 6월 13일~7월 7일
참가국: 16개국
총 득점: 38경기 97골, 평균 2.55
총 관중: 1,774,022명, 평균 46,685
우승국: 서독(통산 2회)

 

 

지역예선

전 대회보다 26개국이나 늘어난 97개국이 참가를 신청함에 따라 지역예선의 스케일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적은 출전 티켓이 주어져 있는 북중미, 아프리카, 아시아 팀들은 1차 예선부터 다단계로 지역예선 일정을 소화해야 했으며, 그 경기 숫자는 무려 224 경기에 달했다.

 

한편 피파는 티켓 수 증가를 요구한 남미 측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럽 9조 1위 팀과 남미 3조 1위 팀으로 하여금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했다. 그로 인해 1966년 대회 우승국 잉글랜드를 포함하여 9개국이 본선에 참가했던 유럽은 0.5장을 남미에 내주며 8.5장의 티켓만을 부여받았다. 그 결과 1974년 대회에서도 스페인, 프랑스, 잉글랜드, 체코, 헝가리 등의 강호들이 지역예선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으며, 특히 잉글랜드의 경우 1950년 대회 첫 참가 이래 처음으로 맛보는 굴욕의 탈락이었다. 반면 제 3 대륙에 해당하는 북중미, 아프리카, 아시아는 변함없이 1장씩의 티켓을 보장받았다. 1장의 출전권을 놓고 수많은 팀들이 다단계 예선을 치러야 하는 열악한 환경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의 월드컵을 향한 의지는 이전보다 훨씬 높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한민국은 최종예선까지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호주의 벽에 가로막혀 아깝게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그룹 대륙 티켓 예선참가국 본선진출국
1 유럽 1 스웨덴, 오스트리아, 헝가리, 몰타 스웨덴
2 유럽 1 이탈리아, 터키, 스위스,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3 유럽 1 네덜란드, 벨기에,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네덜란드
4 유럽 1 동독, 루마니아, 핀란드, 알바니아 동독
5 유럽 1 폴란드, 잉글랜드, 웨일즈 폴란드
6 유럽 1 불가리아, 포르투갈, 북아일랜드, 키프러스 불가리아
7 유럽 1 유고, 스페인, 그리스 유고
8 유럽 1 스코틀랜드, 체코, 덴마크 스코틀랜드
9 유럽 0.5 소련, 아일랜드, 프랑스
* 플레이오프: 칠레-소련, 2차전 소련 기권.
-
10 남미 1 우루과이, 콜롬비아, 에콰도르 우루과이
11 남미 1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12 남미 0.5 칠레, 페루, 베네수엘라(기권)
* 플레이오프: 칠레-소련, 2차전 소련 기권.
칠레
13 북중미 1 최종예선: 아이티, 트리니다드토바고, 멕시코, 온두라스,
과테말라, 네덜란드령 앤틸리스
아이티
14 아프리카 1 최종예선: 자이르, 잠비아, 모로코 자이르
15 아시아·오세아니아 1 최종예선: 이란, 호주 대한민국 호주

 

 

본선 요약

1974년 대회를 통해 일어난 규정상의 두드러진 변화는 바로 2차리그 제도의 도입이었다. 전 대회까지는 16개 팀이 4개 조로 나뉘어 조별리그 전을 치른 뒤 8강부터 토너먼트로 전환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지만, 피파는 4개 조 1, 2위 팀을 다시 2개 조로 나누어 2차리그를 치르는 방식으로 변화를 줬다. 2차리그 제도의 도입으로 인해 74년 대회부터는 경기 수가 32경기에서 38경기로 늘어났다. 2차리그 2개 조의 1위 팀은 토너먼트 없이 결승으로, 2위 팀은 3·4위전으로 직행했는데, 82년 대회에서는 참가국이 24개국으로 늘어남에 따라 2차리그 이후 4강 토너먼트전을 치르는 방식으로 변경됐다. 참고로 조별리그 이후 16강 토너먼트전을 치르는 오늘날의 방식은 1986년 대회부터 도입된 바 있으며, 1998년 대회부터는 출전국이 24개국에서 32개국으로 다시금 늘어났다.

 

당초 이 대회의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는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네덜란드였다. 반면 전 대회 우승국 브라질은 펠레와 토스탕의 은퇴 이후 전력이 한층 약화되어 있었고, 유로 1972를 제패한 서독 역시 그 후에는 기대 이하의 경기력을 선보이고 있던 중이었다. 이 3팀 외에는 마쫄라와 리베라의 공존을 뒤늦게 시도한 이탈리아 정도가 우승을 노려볼 만한 전력으로 평가됐다.

 

대회 초반 행보가 가장 순조로웠던 팀은 네덜란드였다. 전 대회 4강국 우루과이를 압도하는 등 가볍게 조별리그를 통과한 네덜란드는 2차리그에서도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을 연파하며 문제없이 결승으로 직행했다. 반면 서독은 동독과의 조별리그 경기에서 충격의 패배를 경험하는 등 대회 초반에 다소 삐걱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2차리그 들어서는 남다른 뒷심을 발휘하며 무난히 결승전에 안착했다.

 

서독과 네덜란드의 결승전은 이웃 라이벌 간의 정면충돌인 동시에 양국을 대표하는 수퍼스타들인 베켄바워와 크루이프의 자존심 대결로 많은 관심을 모았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네덜란드와 크루이프의 승리를 예상했지만, 서독은 끈질긴 수비와 홈팬들의 응원을 앞세워 네덜란드에 2-1 승리를 거두고 20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 준우승에 머문 네덜란드는 1950년 대회의 브라질, 1954년 대회의 헝가리와 함께 월드컵 역사상 가장 불운했던 2인자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주요 선수

자타가 공인하는 1974년 대회 최고의 선수는 네덜란드를 준우승으로 이끈 요한 크루이프였다. 비록 득점은 3골밖에 성공시키지 못했지만, 순수한 활약도 면에서 크루이프에 대한 평가는 베켄바워나 다른 선수들에 비해 훨씬 더 높았다. 크루이프와 함께 공수를 부지런히 누비고 다닌 미드필더 네스켄스 역시 1974년 대회를 빛낸 대표적인 스타 선수로 손꼽혔다.

 

우승팀 서독에서는 최후에 승리자로 떠오른 프란츠 베켄바워와 함께 해결사 게르트 뮐러, 플레이메이커 볼프강 오버라트, 그리고 결승전에서 크루이프를 잠재운 베르티 포그츠 등이 그 활약상을 높이 평가받았다. 골키퍼 제프 마이어 또한 결정적인 선방으로 서독의 두 번째 우승에 크게 공헌했지만, 유로 1972 최우수 선수였던 귄터 넷처의 경우 오버라트에 밀려 벤치 신세를 면치 못했다.

 

한편 이 대회 4강에 오르며 1972년 올림픽 금메달의 상승세를 이어간 폴란드 역시 그제고시 라토와 카지미에슈 데이나라는 두 명의 걸출한 스타를 배출해냈다. 발 빠른 우측 공격수였던 라토는 플레이메이커 데이나와 절묘한 콤비플레이를 선보이며 총 7골을 성공시켰고, 결국 득점왕에 올랐다. 그 밖에 네덜란드의 벽을 넘지 못하고 4위에 머무른 브라질은 히벨리누와 자이르지뉴가 그나마 분투했을 뿐, 신진급 선수들이 기대 이하의 활약을 선보여 대대적인 혹평을 받았다.

 

 

수상 기록

MVP
1위 요한 크루이프(네덜란드)
2위 프란츠 베켄바워(서독)
3위 카지미에슈 데이나(폴란드)

 

득점
1위 그제고시 라토(폴란드/7골)
2위 요한 네스켄스(네덜란드/5골), 안제이 샬마크(폴란드/5골)
4위 게르트 뮐러(서독/4골), 요니 렙(네덜란드/4골), 라르 에드스트룀(스웨덴/4골)

 

베스트 팀
골키퍼: 제프 마이어(서독).
수비수: 베르티 포그츠, 프란츠 베켄바워, 파울 브라이트너(이상 서독), 루드 크롤(네덜란드), 엘리아스 피게로아(칠레).
미드필더: 볼프강 오버라트(서독), 카지미에슈 데이나(폴란드), 요한 네스켄스(네덜란드).
공격수: 요한 크루이프, 롭 렌센브링크(이상 네덜란드), 그제고시 라토(폴란드).

 

 

서독 월드컵 이모저모

01

개최국 대신 전 대회 우승국이 개막전을 치르는 전통은 바로 이 대회부터 확립됐다. 그러나 2006년 대회에 이르러서는 전 대회 우승국에 자동 출전권을 부여하지 않음에 따라 다시금 개최국이 개막전을 치르게 됐다.

02

1974년 대회는 서독과 동독이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본선에 동반 진출하는 한편, 조별리그에서 서로 맞대결을 펼친 대회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양 국의 자존심 대결은 동독의 1-0 승리로 끝이 났다.

03

동독의 서독 전 승리는 1974년 대회의 가장 대표적인 이변으로 손꼽히며, 이 패배 후 서독의 헬무트 쇤 감독은 TV 방송에 직접 출연하여 입장을 해명해야 했다.

04

브라질은 이 대회 7경기에서 고작 6골만을 성공시키는 데 그쳤고, 이는 경기 당 1골이 채 되지 않는 브라질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기록이다.

05

펠레, 토스탕, 제르손 등의 연이은 국가대표 은퇴로 인해 자갈루 감독은 철저한 수비축구를 승부수로 띄워야 했다. 그 결과 브라질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빈공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4위라는 최소한의 성과를 거뒀다. 그럼에도 자갈루 감독은 브라질 전통의 공격축구를 포기했다는 이유로 자택을 습격 받는 등 엄청난 수난을 겪어야 했다.

06

한편 월드컵에 처녀 출전한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는 유고와의 경기를 앞두고 갑자기 비디니치 감독을 해임하는 해프닝을 일으켰다. 이 해임은 자이르 군사 정권이 유고 출신의 비디니치 감독이 모국의 편의를 봐 줄 것이란 터무니없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갑작스레 사령탑을 잃은 자이르는 결국 유고에 0-9로 대패했다.

07

토털풋볼을 월드컵 무대에 처음으로 선보인 네덜란드는 1974년 대회 내내 화제를 불러 모은 최고의 인기 팀이었다. 포백 라인을 높은 위치까지 끌어 올려 상대를 압박하고, 선수들이 유기적으로 포지션을 변경하며 상대 수비를 혼란시키는 네덜란드의 경기 스타일은 ‘10년 이상 앞선 미래의 축구’라는 호평을 받았다.

08

네덜란드의 미헬스 감독은 이미 아약스 시절부터 토털풋볼로 크게 주목받은 바 있었다. 그러나 토털풋볼은 남미 팀들에게 결코 익숙한 경기 방식이 아니었고, 그로 인해 남미의 ‘3강’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는 네덜란드에 단 한 골도 성공시키지 못하고 나란히 3패를 당해야 했다.

09

요한 크루이프는 1974년 대회를 빛낸 최고의 스타였지만, 서독과의 결승전에서는 포그츠의 거친 수비에 가로막혀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일부 언론들은 크루이프가 하프타임에 흡연을 했다는 설, 사실은 부상으로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다는 설 등을 폭 넓게 제기했으나 선수 본인은 집중력 및 체력 부족에 따른 단순한 패배였음을 분명히 했다.

10

우승국 서독의 경우 지난 유로 72 대회에 이어 ‘리베로 시스템’을 다시 한 번 선보였다. 수비형 미드필더에서 리베로로 포지션을 변경한 베켄바워는 기습적인 공격 가담을 통해 상대 팀 수비에 혼란을 가져다줬으며, 이 전술은 80년대 이후 3-5-2 시스템으로 발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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