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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제9회 멕시코 월드컵

스포츠/월드컵

by 巡禮者 2011. 5. 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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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1970년 월드컵은 북중미의 멕시코에서 5월 31일부터 6월 21일까지 총 22일간 치러졌다. 이 대회는 펠레가 이끄는 브라질이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아름다운 축구쇼를 선보인 ‘역대 최고의 축제’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선수교체, 옐로우 카드 등 새로운 규정이 도입됨에 따라 이전과 같은 거친 경기운영이 사라졌으며, 한 층 공격적인 스타일의 축구가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매김 했다. 그 밖에 피파는 역대 최초로 ‘우승 해트트릭(3회 우승)’을 달성한 브라질에게 줄리메컵 영구 소유권을 부여하며 한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개최국과 대회기간: 멕시코, 1970년 5월 31일~6월 21일
참가국: 16개국
총 득점: 32경기 95골, 평균 2.97
총 관중: 1,603,975명, 평균 50,192
우승국: 브라질(통산 3회)

 

 

 

지역예선

 

피파에 가입된 138개국 가운데 71개국이 참가를 신청, 14장의 본선 진출 티켓을 놓고 자웅을 겨뤘다. 또한 피파는 개최국 멕시코가 자동 진출권을 부여받은 북중미에도 1장의 티켓을 부여하는 한편, 아프리카와 아시아(오세아니아 포함) 그룹에도 각각 1장씩의 티켓을 부여하여 제3 대륙을 적극적으로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전 대회 우승국 잉글랜드가 본선으로 직행한 유럽은 2장의 티켓을 희생시켜야 했다. 이러한 피파의 결정은 전 대회 아프리카 국가들의 예선 보이콧, 그리고 북한이 선보인 8강 돌풍을 높이 평가했다는 점에 기인하고 있었다. 일단 피파는 아프리카에 따로 티켓 1장을 부여하여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한편, 아시아와 오세아니아를 하나의 그룹으로 분류하여 또 다른 티켓 1장을 정식으로 부여했다. 그러나 아시아·오세아니아 그룹에는 유럽의 이스라엘이 배정되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여전히 그 높은 벽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았다.

 

한편 두 장의 티켓을 잃어버린 유럽 지역예선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자리다툼이 벌어졌다. 강팀들이 대거 같은 조에 편성된 결과 스페인, 프랑스, 포르투갈, 네덜란드, 유고, 헝가리 등이 모두 탈락의 고배를 마시는 이변이 연출됐고, 그로 인해 유럽 측의 불만은 점차 한계치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결국 피파는 월드컵 본선 출전국을 16개국에서 24개국으로 늘리는 방안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게 된다.

 

 

그룹 대륙 티켓 예선참가국 본선진출국
1 유럽 1 루마니아, 그리스, 스위스, 포르투갈 루마니아
2 유럽 1 체코, 헝가리, 덴마크, 아일랜드 체코
3 유럽 1 이탈리아, 동독, 웨일즈 이탈리아
4 유럽 1 소련, 북아일랜드, 터키 소련
5 유럽 1 스웨덴, 프랑스, 노르웨이 스웨덴
6 유럽 1 벨기에, 유고, 스페인, 핀란드 벨기에
7 유럽 1 서독, 스코틀랜드, 오스트리아, 키프러스 서독
8 유럽 1 불가리아, 폴란드,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불가리아
9 남미 1 페루,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페루
10 남미 1 브라질, 파라과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브라질
11 남미 1 우루과이, 칠레, 에콰도르 우루과이
12 북중미 1 미국,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아이티 엘살바도르
13 아프리카 1 최종예선: 모로코, 나이지리아, 수단 모로코
14 아시아·오세아니아 1 최종예선: 호주, 대한민국, 일본, 뉴질랜드, 라오스, 이스라엘 이스라엘

 

 

 

본선 요약

 

월드컵은 1970년 대회에 이르러 선수교체, 옐로우 카드, 득실차 제도 등이 도입되는 등 보다 현대적인 모습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특히 피파는 이 대회를 통해 두 팀이 승점 동률을 기록할 경우 득실차 및 다득점에 의해 순위를 구분 짓는 오늘날의 시스템을 확립시켰다. 이 새로운 규정에 처음으로 희생된 국가는 B조에서 득실차로 인해 3위로 밀려난 스웨덴이었다.

 

선수교체 제도 역시 대회 내내 숱한 화제를 불러 모았다. 두 명의 선수교체가 허용됨에 따라 감독들은 한 층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거나 선수들의 체력을 효과적으로 안배할 수 있게 됐지만, 이 당시의 용병술은 지금처럼 계획적이고 치밀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로, 잉글랜드의 램지 감독은 2-1로 앞서고 있던 서독과의 8강전에서 지나치게 일찍 바비 찰튼을 불러들였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3-2 역전패를 당하는 아픔을 감수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발카레지 감독 역시 선수교체 용병술로 논란을 일으켰다. 카테나치오(빗장수비) 전술 아래서 두 명의 창의적인 미드필더들인 마쫄라와 리베라를 공존시킬 수 없었던 발카레지 감독은 전반 45분을 마쫄라에게, 후반 45분을 리베라에게 맡기는 ‘스타페타(Staffetta) 전략’을 들고 나왔다. 얼핏 보기에 이 용병술은 매우 공평해 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두 선수 모두가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한편 1970년 대회의 가장 큰 관심사는 지난 1966년 대회에서 자존심을 구길 대로 구긴 브라질의 명예회복 여부였다. 그러나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일어난 감독 교체 사건은 브라질의 팀 분위기를 어수선한 양상으로 몰고 갔고, 그로 인해 유럽세의 전력을 더 높이 평가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았다. 지난 대회 챔피언 잉글랜드를 비롯, 유로 68 우승팀 이탈리아와 베켄바워를 앞세운 서독 등의 전력이 워낙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별리그에서 잉글랜드를 1-0으로 제압하는 등 3전 전승으로 8강에 오른 브라질의 경기력은 그 어느 때보다 완벽했다. 펠레를 중심으로 자이르지뉴, 토스탕, 히벨리누, 제르손 등이 황금의 공격 라인을 구축했고, 브라질에게 결승 진출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탈리아와 함께 줄리메컵 영구 소유권을 놓고 자웅을 겨룬 브라질은 결승전에서도 4-1로 완벽하게 승리, 사상 첫 ‘우승 해트트릭(3회 우승)’을 달성하는 기쁨을 누렸다.

 

 

 

  

 

 

주요 선수

 

1970년 대회 당시의 브라질은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팀으로 추앙받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펠레는 가장 밝게 빛나는 별 중의 별이었다. 29세의 펠레는 젊은 시절만큼 폭발적이지는 않았지만, 풍부한 경험과 숙련된 테크닉을 앞세워 경기 전체를 마음먹은 대로 컨트롤했다. 사람들은 이러한 펠레의 모습을 ‘축구의 신’에 비유했고, 이 대회 활약을 통해 펠레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펠레와 함께 70년 월드컵 전 경기 득점(7경기 7골)을 기록한 자이르지뉴, 재치 만점의 찬스 메이커 토스탕, 그리고 미드필드진의 핵심 히벨리누와 제르손 등은 이른 바 ‘황금의 5중주’를 이룬 스타 선수들이었다. 그 외에도 팀의 주장이자 우측 수비수 카를로스 알베르투와 수비형 미드필더 클로도알두 역시 대회 내내 기복 없이 꾸준한 활약을 펼쳐 높은 평가를 받았다.

 

준우승국 이탈리아에서는 간판 공격수 루이지 리바의 활약이 가장 돋보였다. 지안니 리베라 역시 고비 때마다 중요한 골을 터뜨리며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해냈지만, 산드로 마쫄라와의 ‘45분 분담 시스템’으로 인해 두 선수 모두 진정한 이탈리아의 에이스로 활약하진 못했다. 수비진에서는 지아친토 파케티가 이탈리아의 대회 초반 283분 무실점 행진을 주도하며 준우승에 크게 공헌했다.

 

그 외에도 득점왕을 차지한 서독의 게르트 뮐러, 그 뒤를 든든하게 받친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워, 페루의 에이스 테오필로 쿠비야스, 우루과이 수문장 라디슬라오 마주르키비쉬, 잉글랜드의 바비 찰튼과 바비 무어 등 기라성 같은 스타 선수들이 1970년 대회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특히 게르트 뮐러는 1954년 대회의 코치슈, 1958년 대회의 퐁텐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한 대회 2회 해트르릭 기록을 달성, 월드컵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수상 기록

 

MVP
1위 펠레(브라질)
2위 제르손(브라질)
3위 바비 무어(잉글랜드)

 

득점
1위 게르트 뮐러(서독/10골)
2위 자이르지뉴(브라질/7골)
3위 테오필로 쿠비야스(페루/5골)

 

베스트 팀
골키퍼: 라디슬라오 마주르키비쉬(우루과이).
수비수: 카를로스 알베르투(브라질), 바비 무어(잉글랜드), 프란츠 베켄바워(서독), 지아친토 파케티(이탈리아).
미드필더: 제르손, 히벨리누(이상 브라질), 바비 찰튼(잉글랜드).
공격수: 펠레, 자이르지뉴(이상 브라질), 게르트 뮐러(서독).

 

 

 

멕시코 월드컵 이모저모

01

1970년 멕시코 대회는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도 남미도 아닌 제3 대륙에서 개최된 대회였다. 본래 1970년 대회의 유력한 개최국 후보는 아르헨티나였지만 피파가 멕시코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제  대륙의 입지를 넓혀주기 위해서였다는 설이 있다.

02

또한 1970년 월드컵은 월드컵 경기가 처음으로 컬러 TV 중계되기 시작한 대회다. 조직 위원회 측은 유럽 국가의 중계 일정을 고려하여 경기 시간대도 임의적으로 조정했다.

03

월드컵 공인구 역시 1970년 대회에서 처음으로 사용됐다. 독일의 아디다스는 이 대회부터 월드컵 공식 후원사로 자리매김했으며, 기념비적인 첫 공인구의 이름은 ‘아디다스 텔스타(Adidas Telstar)’였다.

04

전 대회 우승국 잉글랜드는 기자회견 일정을 취소하고 곧바로 합숙소로 향하는 한편, 식수를 비롯한 물품들을 본국에서 공수해 와 현지인들의 반감을 샀다. 또한 잉글랜드는 멕시코의 70년 대회 개최를 반대했던 전력을 갖고 있어 현지 언론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05

잉글랜드 주장 바비 무어의 경우 멕시코 입국 전 콜롬비아에서 보석 도둑으로 오해받는 해프닝에 연루되기까지 했다. 무어는 찰튼 부인의 선물을 함께 고르기 위해 보석점을 방문했는데, 이 때 에메랄드 도둑으로 오해를 받아 경찰에 체포되는 수모를 당했다. 이 사건에는 중남미 현지인들의 잉글랜드에 대한 반감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06

한편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는 지역예선 도중 그 유명한 축구 전쟁을 치러 월드컵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 흔히 ‘100시간 전쟁’으로 잘 알려져 있는 양국의 축구 전쟁은 한 18세 소녀의 자살에서부터 시작됐다. 엘살바도르가 온두라스와의 2차 예선 1차전에서 0-1로 패하자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소녀가 권총으로 자살을 하고 만 것이다.

07

소녀의 자살 이후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를 꺾어야 한다는 의지로 불타올랐다. 결국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를 꺾고 최종 라운드로 향할 수 있었지만, 거친 경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양 국의 감정은 악화될 대로 악화됐다. 또한 두 나라는 1940년대부터 국경 미확정 지역에 거주하는 농민들에 대한 처우 문제로 극심한 정치적 갈등을 겪어 온 상태였다.

08

축구를 통해 수십 년 간의 해묵은 감정이 폭발한 양국은 결국 전쟁으로 돌입했다. 100시간 동안 치른 이 전쟁의 결과는 무고한 농민 1,000여 명의 죽음이었다.

09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골 중 하나로 손꼽히는 카를로스 알베르투의 결승전 4번째 득점은 기념비적인 브라질 통산 100호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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