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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제6회 스웨덴 월드컵

스포츠/월드컵

by 巡禮者 2011. 5. 1.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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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1958년 월드컵은 유럽의 스웨덴에서 6월 8일부터 6월 29일까지 총 21일간 치러졌다. 지난 1954년 대회를 통해 진정한 세계축구선수권대회로 거듭나는 데 성공한 월드컵은 1958년 대회에 이르러 한 층 거대한 스케일의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조별리그에 풀리그 방식이 도입됨에 따라 기본 경기 수 또한 24경기에서 32경기로 늘어났다. 17세 소년 펠레가 혜성처럼 등장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로 떠오른 것도 바로 이 대회를 통해서였다.

 

개최국과 대회기간: 스웨덴, 1958년 6월 8일~6월 29일

참가국: 16개국
총 득점: 35경기 126골, 평균 3.60
총 관중: 919,580명, 평균 26,274
우승국: 브라질(통산 1회)

 

 

지역예선

개최국 스웨덴과 전 대회 우승국 서독을 제외한 51개국이 참가 의사를 표명함에 따라 각 대륙의 지역예선도 한 층 치열해졌다. 1934년 대회 이후 무려 20년 이상 월드컵과 멀어져 있던 아르헨티나가 마침내 복귀를 신고했고, 2차 세계대전 후유증으로부터 벗어난 유럽 국가들도 월드컵에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의욕을 나타냈다. 여러 국가들이 도중 기권하는 사태도 이전에 비해 보기 드물어졌다. 그러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 대회에서 헝가리에 0-9, 터키에 0-7로 참패를 당하며 세계 축구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던 대한민국은 축구협회 직원의 참가 신청서 분실로 1958년 대회에는 예선조차 출전하지 못하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이웃나라 대한민국의 실패를 지켜보며 스스로의 수준을 비관한 일본은 예선을 기권했으며, 인도네시아와 수단 등도 종교적인 이유로 참가 자체를 거부해 버렸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배정된 티켓 수도 이전보다 줄어들었다. 지난 대회에서 1장의 티켓을 배정받았던 아시아는 아프리카와 같은 그룹으로 분류되어 사실상 0.5장의 티켓을 놓고 다퉈야 했다. 설령 이 그룹을 돌파하더라도 이스라엘이나 다른 유럽 국가들과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기 때문에 본선으로 가는 문틈은 이전보다 더욱 좁아진 상황이었다. 이는 대한민국이 1954년 대회를 통해 세계 축구와 극심한 수준 차를 드러내자 피파 조직위원회 측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팀의 출전 가능성을 크게 제한시킨 결과였다.

  

그룹 대륙 티켓 예선참가국 본선진출국
1 유럽 1 잉글랜드, 아일랜드, 덴마크 잉글랜드
2 유럽 1 프랑스, 벨기에, 아이슬란드 프랑스
3 유럽 1 헝가리, 불가리아, 노르웨이 헝가리
4 유럽 1 체코, 웨일즈, 동독 체코
5 유럽 1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오스트리아
6 유럽 1 소련, 폴란드, 핀란드 소련
7 유럽 1 유고, 루마니아, 그리스 스페인
8 유럽 1 북아일랜드, 이탈리아, 포르투갈 북아일랜드
9 유럽 1 스코틀랜드, 스페인, 스위스 스코틀랜드
10 남미 1 브라질, 페루, 베네수엘라(기권) 브라질
11 남미 1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12 남미 1 파라과이, 우루과이, 콜롬비아 파라과이
13 북중미 1 멕시코, 코스타리카 멕시코
14 유럽 1 인도네시아(기권), 이집트(기권), 수단(기권), 이스라엘 * 플레이오프: 이스라엘-웨일즈 웨일즈

 

 

본선 요약

16개 출전국을 4팀씩 4개 조로 나누고, 각 조 1·2위 팀이 8강부터 토너먼트 방식으로 격돌하는 지난 1954년 대회의 방식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 조별리그에 풀리그 방식이 도입됨으로써 본선 경기 수가 24경기에서 32경기로 늘어났다는 점이 가장 눈에 띄는 변화였다. 지난 1954년 대회에서는 피파에서 도입한 시드 배정 시스템으로 인해 한 팀이 조별리그 경기를 두 경기밖에 치르지 않았지만, 피파는 이러한 진행방식이 그리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각 조 2위 팀과 3위 팀이 승점 동률을 기록할 경우 득실차, 승자승, 다득점 등으로 순위를 가리지 않고 플레이오프 재경기를 치르는 기존 방식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 그 결과 승점 동률을 기록한 A조의 북아일랜드와 체코, C조의 웨일즈와 헝가리, D조의 소련과 잉글랜드는 조별리그 이후 플레이오프 일정을 추가로 소화해야 했다. 그로 인해 1958년 대회에서는 기본 32경기에 플레이오프 3경기를 더해 총 35경기가 치러졌다.

 

한편 1958년 대회는 시작 전부터 뚜렷한 우승후보가 존재하지 않아 흥미진진한 혼전 구도가 예상됐다. 1950년대 초중반을 풍미했던 전 대회 준우승국 헝가리는 1956년에 일어난 동란으로 인해 주축 선수들이 해외로 망명해 버렸고, 챔피언 서독 역시 지난 대회의 기세가 한 풀 꺾여 있었다. 잉글랜드는 연초에 일어난 뮌헨 비행기 사고 탓에 대표팀 주축 선수들을 하늘로 떠나보내야 했으며, 모처럼 월드컵 무대로 돌아온 아르헨티나의 경우 디 스테파노와 시보리 등이 스페인과 이탈리아로 유출된 상태였다.

 

브라질과 프랑스는 이러한 빈틈을 파고들어 1958년 대회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대표적인 두 나라였다. 그로 인해 두 팀간의 준결승전은 사실상의 결승전에 비유되기도 했는데, 경기 결과는 17세 소년 펠레가 해트트릭을 기록한 브라질의 5-2 승리였다. 파죽지세로 결승까지 오른 브라질은 개최국 스웨덴까지 5-2로 완파하며 사상 처음으로 대회 정상에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 플레이오프 결과: 북아일랜드 2-1 체코, 웨일즈 2-1 헝가리, 소련 1-0 잉글랜드.

 

 

주요 선수

17세 소년 펠레의 활약을 빼놓고 1958년 대회를 설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소련과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를 통해 당시로써는 역대 최연소 나이(17세 235일)로 월드컵 데뷔전을 치른 펠레는 웨일즈와의 8강전, 프랑스와의 4강전을 통해 역대 최연소 득점(17세 239일) 및 역대 최연소 해트트릭(17세 244일) 기록을 차례로 갱신해나갔다. 결승전에서도 두 골을 터뜨리며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끈 펠레에게 전 세계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세계 최고의 선수”라는 호평을 내렸다. 펠레와 함께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끈 또 한 명의 마법사는 바로 디디였다. 지지뉴의 뒤를 잇는 브라질 최고의 플레이메이커이자 테크니션 미드필더였던 디디는 탁월한 테크닉과 오차 없는 패싱력, 그리고 골키퍼 앞에서 뚝 떨어지는 독특한 드롭킥 기술로 1958년 대회를 화려하게 수놓은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였다. 펠레, 디디와 함께 우측 날개 가린샤 또한 탁월한 드리블 돌파 능력을 선보여 ‘브라질의 스탠리 매튜스’라는 극찬을 받았다.

 

한편 프랑스는 월드컵 역대 최고의 찰떡콤비로 불리는 쥐스트 퐁텐과 레이몽 코파를 앞세워 이 대회 3위를 차지했다. 특히 퐁텐은 총 13골을 성공시켜 득점왕에 오르는 한편, 한 대회 최다 득점 기록 및 전 경기 출전 전 경기 득점 기록 등을 수립하며 월드컵 역사의 한 페이지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천부적인 테크닉과 패싱력을 앞세워 디디와 쌍두마차를 이룬 ‘그라운드 위의 나폴레옹’ 코파 역시 대회 내내 전문가들로부터 절찬을 받았다. 개최국 스웨덴에서는 1948년 올림픽 우승 주역들인 군나르 그렌과 닐스 리트홀름의 노익장이 매우 돋보였다. 그러나 그렌, 리트홀름과 함께 ‘그레-놀-리(Gre-No-Li)’ 3인방을 이뤘던 군나르 노르달은 부상 및 노쇠화로 인해 아쉽게도 이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 밖에 소련의 골키퍼 야신은 펠레와 함께 이 대회를 통해 월드컵 데뷔전을 치렀다.

 

 

수상 기록

MVP
1위 디디(브라질)
2위 펠레(브라질)
3위 레이몽 코파(프랑스)

 

득점
1위 쥐스트 퐁텐(프랑스/13골)
2위 펠레(브라질/6골), 헬무트 란(서독/6골)
4위 바바(브라질/5골), 피터 맥도널드(북아일랜드/5골)

 

베스트 팀
골키퍼: 헤리 그렉(북아일랜드).
수비수: 레이몽 켈벨(프랑스), 벨리니, 니우톤 산토스(이상 브라질).
미드필더: 지투, 디디(이상 브라질).
공격수: 펠레, 가린샤(이상 브라질), 레이몽 코파, 쥐스트 퐁텐(이상 프랑스), 군나르 그렌(스웨덴).

 

 

스웨덴 월드컵 이모저모

01

1958년 월드컵은 영국에 포함된 4개국(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이 모두 본선에 참가한 유일무이한 대회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 중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조별리그를 통과하지 못한 반면, 웨일즈와 북아일랜드는 8강까지 올랐다.

02

잉글랜드가 이 대회에서 부진을 면치 못한 이유 중 하나는 1958년 2월에 일어난 뮌헨 비행기 사고의 영향이 컸다. 이 사고로 인해 다수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 및 관계자들이 세상을 떠났고, 이 가운데 토미 테일러, 던컨 에드워즈, 로저 바인은 잉글랜드 대표팀 전력의 핵을 이루는 스타플레이어 3인방이었다.

03

또한 1958년 월드컵은 소련이 처음으로 참가를 신청한 대회이자, 이탈리아가 유일하게 본선 진출에 실패한 대회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04

월드컵 창설 및 발전 과정에 지대한 공헌을 세운 피파 3대 회장 줄 리메는 1956년 10월에 타계했다. 그로 인해 1958년 대회는 전반적으로 줄 리메 회장을 추모하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05

17세 소년 펠레는 이 대회를 통해 월드컵과 관련된 여러 가지 새로운 기록들을 탄생시켰다. 비록 월드컵 역대 최연소 출전 기록(17세 235일)은 24년 뒤 북아일랜드의 노먼 와이트사이드(17세 4일)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지만, 역대 최연소 득점 기록(17세 239일), 역대 최연소 해트트릭 기록(17세 244일), 역대 최연소 결승전 출전 및 득점 기록(17세 249일) 등은 아직도 펠레가 보유하고 있는 월드컵 관련 진기록들이다.

06

브라질의 1958년 대회 우승은 비유럽 국가가 유럽에서 열린 월드컵을 제패한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례다. 참고로 유럽에서 열린 10번의 월드컵 중 9번이 유럽 국가의 우승으로 마무리 된 반면, 비유럽에서 열린 8번의 월드컵은 8번 모두 남미 국가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07

브라질 선수들은 우승이 확정된 직후 개최국이자 결승전 상대국 스웨덴의 국기를 들고 경기장 내를 질주했다. 이 모습을 지켜 본 스웨덴 홈 관중들은 모두 기립박수를 보냈고, 세계 각 국의 언론들 역시 “월드컵이 필드 위의 전쟁에서 세계를 하나로 묶어주는 평화의 제전으로 거듭났다” 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08

한편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와 상파울루에서는 수 백 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대규모 소동을 일으켰다. 페올라 감독과 브라질 대표팀 선수들은 대통령으로부터 명예시민 훈장까지 수여받았다.

09

반면 24년 만에 참가한 월드컵에서 조별리그 탈락이란 최악의 성적을 거둔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공항에서 썩은 야채 세례를 받아야 했다. 스타빌레 감독 역시 대표팀에서 물러나란 비난 속에서 쓸쓸히 귀국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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