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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1934년 제2회 이탈리아 월드컵

스포츠/월드컵

by 巡禮者 2011. 5. 1.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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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1934년 월드컵은 유럽의 이탈리아에서 5월 27일부터 6월 10일까지 총 15일간 치러졌다. 피파는 본래 독재자 무솔리니의 파시즘 선전을 우려하여 이탈리아의 월드컵 개최에 난색을 표명했지만, 대공황으로 인해 스웨덴이 자진 사퇴를 발표하자 어쩔 수 없이 개최권을 부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 대회 우승국 우루과이가 유럽 측과의 갈등 관계로 불참을 선언했고, 아르헨티나 역시 2진을 내보냈으며, 종주국 잉글랜드의 참가도 이뤄지지 않아 여전히 진정한 세계선수권대회로 거듭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개최국과 대회기간: 이탈리아, 1934년 5월 27일~6월 10일

참가국: 16개국
총 득점: 17경기 70골, 평균 4.12
총 관중: 358,000명, 평균 21,059
우승국: 이탈리아(통산 1회)

 

 

지역예선

월드컵 대회에서 지역예선이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1934년 대회부터였다. 개최 자체에 의의를 두며 예선조차 치르지 못했던 1회 대회와 다르게, 총 32개국이 참가 신청서를 제출한 2회 대회에서는 유럽 21개국이 12장의 티켓을, 남미 4개국이 2장의 티켓을, 북중미 4개국이 1장의 티켓을, 그리고 아프리카와 아시아 3개국이 1장의 티켓을 놓고 지역예선전을 치렀다. 개최국 이탈리아가 자동으로 본선에 합류하지 않고 예선을 치렀다는 점도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한편 총 12개조로 나뉘어 진행된 지역예선은 두 팀이 한 조에 편성될 경우 홈&어웨이 이판 승부제를, 세 팀이 한 조에 편성될 경우에는 홈과 원정에서 한 경기씩을 치르는 삼판 승부제를 기본 원칙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남미에서는 우루과이에 이어 칠레와 페루마저 참가 자격을 포기함으로써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자동으로 본선에 진출하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그룹 대륙 티켓 예선참가국 본선진출국
1 유럽 1 스웨덴,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스웨덴
2 유럽 1 스페인, 포르투갈 스페인
3 유럽 1 이탈리아, 그리스 이탈리아
4 유럽 2 헝가리,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5 유럽 1 체코, 폴란드 체코
6 유럽 2 스위스, 루마니아, 유고 스위스
루마니아
7 유럽 2 네덜란드, 벨기에, 아일랜드 네덜란드
벨기에
8 유럽 2 독일, 프랑스, 룩셈부르크 독일
프랑스
9 남미 1 브라질, 페루(기권) 브라질
10 남미 1 아르헨티나, 칠레(기권) 아르헨티나
11 북중미 1 쿠바, 아이티, 멕시코, 미국 미국
12 아시아•아프리카 1 이집트, 팔레스타인, 터키(기권) 이집트

 

 

본선 요약

지역예선을 거쳐 확정된 출전 16개국은 조별리그 없이 곧바로 토너먼트 방식으로 본선 경기를 치렀다. 피파는 제3회 1938년 대회까지 이 진행방식을 고스란히 유지했는데, 그로 인해 1934년 대회와 1938년 대회는 ‘죽음의 월드컵’이란 별칭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이러한 진행방식에 가장 긴장을 늦추지 못한 팀은 ‘무조건 우승’ 을 목표로 내세웠던 개최국 이탈리아였다. 우승 이외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던 이탈리아에게 한 차례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 토너먼트 방식은 작지 않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대회 최강의 우승후보로 이탈리아를 지목하지 않았다. 이탈리아보다 높은 평가를 확보한 팀은 ‘분더팀’(Wunderteam, 영어로 원더팀)이란 애칭으로 불리던 마이슬 감독의 오스트리아였다. 무엇보다 개최국 이탈리아는 이미 수개월 전에 오스트리아와의 맞대결에서 완패를 당한 경험이 있었고, 그 당시 오스트리아는 에이스 마티아스 진델라 없이 원정 경기에서 승리를 거뒀다.

이처럼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에 비해 한 수 아래의 전력이란 평가를 받았으나 독재자 무솔리니의 월드컵 우승을 향한 의지는 “승리가 아니면 죽음을” 이란 단체 구호로 승화되고 있었다. 무솔리니는 월드컵을 대대적인 파시즘 선전의 장으로 활용하는 한편, 우승을 위해 아르헨티나 이민계 선수들까지 대표팀으로 끌어들이는 사전 공작을 펼쳤다.

 

그 결과 이탈리아는 8강전에서 스페인을, 4강전에서 최대 라이벌 오스트리아를 누르고 결승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기세가 오른 이탈리아는 체코와의 결승전마저 승리로 장식하며 사상 첫 우승의 영광을 차지했지만, 8강전과 4강전에서 일어난 대대적인 판정 논란은 아직까지도 제2회 월드컵의 ‘옥의 티’로 간주되고 있다. 그 밖에 이 대회는 유럽 팀들이 8강을 모두 점령한 유일무이한 사례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8강전은 연장전에서도 승부를 가리지 못해 재경기

 

   

 

주요 선수

1934년 대회를 빛낸 최고의 선수는 이탈리아 주장 주세페 메아짜였다. 기자단이 선정한 대회 MVP로 손꼽힌 메아짜는 기술, 두뇌, 스피드를 겸비한 만능 공격수이자 팀의 리더로서 대회 내내 최고 수준의 기량을 선보였다는 호평을 받았다. 메아짜와 함께 대회 4득점을 올린 골잡이 스키아비오, 아르헨티나 출신 귀화 3인방 과이타, 오르시, 몬티 등도 이탈리아의 첫 우승에 크게 공헌한 주역들이다.

 

메아짜의 맞수는 ‘분더팀’ 오스트리아의 마티아스 진델라였다. 깡마른 체구로 인해 ‘종이인간(Der Papierene)’이란 애칭으로 유명세를 떨친 진델라는 자타가 공인하는 1930년대 유럽 최고의 공격수 중 한 명인 동시에, 아직까지도 20세기 최고의 오스트리아 선수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전설 속 축구 영웅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와의 4강전에서는 몬티의 거친 수비에 가로막혀 진가를 발휘하지 못했다.

 

그 외에는 메아짜의 뒤를 이어 MVP 투표 2위에 오른 스페인 골키퍼 리카르도 사모라가 대회 내내 인기를 모은 화제의 인물이었다. 이탈리아와의 8강전에서 신들린 듯한 선방을 선보이며 무솔리니마저 경탄시킨 사모라는 현지 팬들에 의해 ‘거미인간’이란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외에는 5골로 득점왕을 차지한 체코의 준우승 주역 네예틀리와 스페인 수비수 킨코세스 등이 그 활약상을 높이 평가받았다.

 

 

수상 기록

MVP
1위 주세페 메아짜(이탈리아)
2위 리카르도 사모라(스페인)
3위 올드리크 네예틀리(체코)

 

득점
1위 올드리크 네예틀리(체코/5골)
2위 에드문드 코넨(독일/4골), 안젤로 스키아비오(이탈리아/4골)
4위 라이문도 오르시(이탈리아/3골), 레오폴드 키엘홀츠(스위스/3골)

 

베스트 팀
골키퍼: 리카르도 사모라(스페인).
수비수: 하신토 킨코세스(스페인), 에랄도 몬셀리오(이탈리아).
미드필더: 루이스 몬티, 아틸로 페라리스(이상 이탈리아), 레오나르도 실라우렌(스페인).
공격수: 쥐세페 메아짜, 라이문도 오르시, 엔리케 과이타(이상 이탈리아), 마티아스 진델라(오스트리아), 올드리크 네예틀리(체코).

 

* 참고: 2006년 11월 이전까지 1934년 대회 득점 순위는 네예틀리(체코), 코렌(독일), 스키아비오(이탈리아)까지 총 3명이 4득점으로 공동 1위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피파 측의 자료 검토 결과 네예틀리의 1득점이 누락된 것으로 판명, 2006년 11월 이후에는 네예틀리의 단독 1위로 기록이 수정됐다.

 

 

이탈리아 월드컵 이모저모

01

전 대회 우승국 우루과이는 1회 대회에 대거 불참했던 유럽 측에 불만을 품고 2회 대회에 참가 신청서조차 내지 않았다. 칠레와 페루 역시 우루과이의 뒤를 따랐으며, 아르헨티나의 경우 2진을 내보냈다.

02

이러한 남미 팀들의 유럽 대회 불참, 유럽 팀들의 남미 대회 불참에는 양 대륙의 첨예한 감정다툼 이외에도 교통 문제가 중요한 이유로 작용했다. 당시 유럽과 남미를 오고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2주 이상 장거리 항해를 감행해야 했으며, 이에 따른 경비 부담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03

브라질이 유럽에서 열린 1934년 대회와 1938년 대회에 모두 참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커피 선박 덕분이었다. 브라질 선수들은 커피 수출을 위해 유럽으로 향하는 선박에 몸을 실은 뒤 현지에서 커피를 팔아 경비를 조달함으로써 근근이 대표팀을 꾸려나갔다. 이러한 ‘1930년대 개근’에 힘입어 브라질은 아직까지도 유일무이한 월드컵 전 대회 참가국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04

미국과 멕시코는 대회 개막 전까지 북중미 예선 일정을 마무리 하지 못해 이탈리아 입국 이후 잔여 경기를 치르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양국은 “우리가 본선에 진출할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이탈리아행 선박에 몸을 실었다” 며 서로 자신감을 표출했지만, 이탈리아 로마에서 치러진 최종예선전은 결국 미국의 4-2 승리로 끝이 났다.

05

본선 진출 실패 팀으로서 유일하게 이탈리아에 입국한 멕시코 선수들은 결국 관광을 즐기다가 자국 행 선박에 몸을 실어야 했다.

06

한편 이탈리아 독재자 무솔리니는 국가 전체의 정신적 통합 및 파시즘 선전을 위해 1934년 월드컵을 철저히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배고픔에 굶주린 이탈리아 국민들의 불만과 광기를 축구장으로 돌리는 데 성공한 무솔리니는 관중들로 하여금 “이탈리아를 위해 죽어라” 라는 응원구호를 외치도록 만들었다.

07

또한 개최국 이탈리아는 스페인과의 8강전, 오스트리아와의 4강전에서 대대적인 편파 판정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페라리가 스페인을 상대로 동점골을 성공시키는 과정에서 사모라 골키퍼에게 명백한 반칙을 범했음에도 불구, 주심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 진델라에 대한 몬티의 거친 파울도 대부분이 묵살되며 상대 팀들의 반발을 샀다.

08

1920~30년대의 가장 발달된 미디어 형태는 바로 라디오였다. 제대로 된 중계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던 1회 대회의 우루과이와 다르게, 2회 대회의 이탈리아는 각 경기장에 중계 시설을 완비하여 9개국 15채널로 하여금 월드컵 경기를 생중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이러한 라디오 중계를 활용, 파시즘을 선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09

수도 몬테비데오의 경기장만을 사용했던 1회 대회와 달리 2회 대회에서는 로마, 토리노, 밀라노, 나폴리 등 총 8개 도시에서 17경기가 진행됐다. 이후 월드컵은 한 도시가 아닌 전국 범위로 대회를 진행시키는 고유의 운영 시스템을 확립했다.

10

월드컵 우승 이후 이탈리아는 진정한 세계 최강으로 인정받기 위해 종주국 잉글랜드로 원정을 떠났다. 이 경기는 ‘하이버리의 난투극’으로 불리며 아직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을 정도인데, 이탈리아 몬티의 다리가 부러지는 등 선수들의 부상이 속출할 정도로 전쟁에 가까운 혈투가 벌어졌다. 결과는 잉글랜드의 4-3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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