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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유럽 | 1 | 스웨덴,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 스웨덴 |
2 | 유럽 | 1 | 스페인, 포르투갈 | 스페인 |
3 | 유럽 | 1 | 이탈리아, 그리스 | 이탈리아 |
4 | 유럽 | 2 | 헝가리,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 헝가리 오스트리아 |
5 | 유럽 | 1 | 체코, 폴란드 | 체코 |
6 | 유럽 | 2 | 스위스, 루마니아, 유고 | 스위스 루마니아 |
7 | 유럽 | 2 | 네덜란드, 벨기에, 아일랜드 | 네덜란드 벨기에 |
8 | 유럽 | 2 | 독일, 프랑스, 룩셈부르크 | 독일 프랑스 |
9 | 남미 | 1 | 브라질, 페루(기권) | 브라질 |
10 | 남미 | 1 | 아르헨티나, 칠레(기권) | 아르헨티나 |
11 | 북중미 | 1 | 쿠바, 아이티, 멕시코, 미국 | 미국 |
12 | 아시아•아프리카 | 1 | 이집트, 팔레스타인, 터키(기권) | 이집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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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
전 대회 우승국 우루과이는 1회 대회에 대거 불참했던 유럽 측에 불만을 품고 2회 대회에 참가 신청서조차 내지 않았다. 칠레와 페루 역시 우루과이의 뒤를 따랐으며, 아르헨티나의 경우 2진을 내보냈다. |
02 |
이러한 남미 팀들의 유럽 대회 불참, 유럽 팀들의 남미 대회 불참에는 양 대륙의 첨예한 감정다툼 이외에도 교통 문제가 중요한 이유로 작용했다. 당시 유럽과 남미를 오고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2주 이상 장거리 항해를 감행해야 했으며, 이에 따른 경비 부담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
03 |
브라질이 유럽에서 열린 1934년 대회와 1938년 대회에 모두 참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커피 선박 덕분이었다. 브라질 선수들은 커피 수출을 위해 유럽으로 향하는 선박에 몸을 실은 뒤 현지에서 커피를 팔아 경비를 조달함으로써 근근이 대표팀을 꾸려나갔다. 이러한 ‘1930년대 개근’에 힘입어 브라질은 아직까지도 유일무이한 월드컵 전 대회 참가국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
04 |
미국과 멕시코는 대회 개막 전까지 북중미 예선 일정을 마무리 하지 못해 이탈리아 입국 이후 잔여 경기를 치르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양국은 “우리가 본선에 진출할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이탈리아행 선박에 몸을 실었다” 며 서로 자신감을 표출했지만, 이탈리아 로마에서 치러진 최종예선전은 결국 미국의 4-2 승리로 끝이 났다. |
05 |
본선 진출 실패 팀으로서 유일하게 이탈리아에 입국한 멕시코 선수들은 결국 관광을 즐기다가 자국 행 선박에 몸을 실어야 했다. |
06 |
한편 이탈리아 독재자 무솔리니는 국가 전체의 정신적 통합 및 파시즘 선전을 위해 1934년 월드컵을 철저히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배고픔에 굶주린 이탈리아 국민들의 불만과 광기를 축구장으로 돌리는 데 성공한 무솔리니는 관중들로 하여금 “이탈리아를 위해 죽어라” 라는 응원구호를 외치도록 만들었다. |
07 |
또한 개최국 이탈리아는 스페인과의 8강전, 오스트리아와의 4강전에서 대대적인 편파 판정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페라리가 스페인을 상대로 동점골을 성공시키는 과정에서 사모라 골키퍼에게 명백한 반칙을 범했음에도 불구, 주심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 진델라에 대한 몬티의 거친 파울도 대부분이 묵살되며 상대 팀들의 반발을 샀다. |
08 |
1920~30년대의 가장 발달된 미디어 형태는 바로 라디오였다. 제대로 된 중계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던 1회 대회의 우루과이와 다르게, 2회 대회의 이탈리아는 각 경기장에 중계 시설을 완비하여 9개국 15채널로 하여금 월드컵 경기를 생중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이러한 라디오 중계를 활용, 파시즘을 선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09 |
수도 몬테비데오의 경기장만을 사용했던 1회 대회와 달리 2회 대회에서는 로마, 토리노, 밀라노, 나폴리 등 총 8개 도시에서 17경기가 진행됐다. 이후 월드컵은 한 도시가 아닌 전국 범위로 대회를 진행시키는 고유의 운영 시스템을 확립했다. |
10 |
월드컵 우승 이후 이탈리아는 진정한 세계 최강으로 인정받기 위해 종주국 잉글랜드로 원정을 떠났다. 이 경기는 ‘하이버리의 난투극’으로 불리며 아직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을 정도인데, 이탈리아 몬티의 다리가 부러지는 등 선수들의 부상이 속출할 정도로 전쟁에 가까운 혈투가 벌어졌다. 결과는 잉글랜드의 4-3 승리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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