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1950년 제4회 브라질 월드컵

스포츠/월드컵

by 巡禮者 2011. 5. 1. 17:10

본문

제4회 1950년 월드컵은 남미의 브라질에서 6월 24일부터 7월 16일까지 총 23일 간 치러졌다.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12년간의 공백기를 가져야 했던 만큼 줄 리메 회장의 월드컵 재시작을 향한 의욕은 매우 남달랐다. 또한 피파는 줄 리메 회장 취임 25주년을 기념하여 월드컵 대회의 공식 명칭을 ‘줄리메컵 세계선수권축구대회’로 변경했다. 이처럼 활기 찬 분위기 속에서 재개된 월드컵이었지만, 오랜 전쟁에 타격을 받은 유럽 국가들의 참가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소극적이었다. 결국 제 4회 대회는 13개국이 참가하는 조촐한 형태로 치러졌고, 12년 만의 재시작에 의의를 둬야 했다.

 

개최국과 대회기간: 브라질, 1950년 6월 24일~7월 16일
참가국: 13개국
총 득점: 22경기 88골, 평균 4.00
총 관중: 1,036,000명, 평균 47,091
우승국: 우루과이(통산 2회)

 

 

지역예선

1950년 대회의 가장 큰 수확은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가 처음으로 월드컵 무대에 고개를 내밀었다는 점이었다. 영국에 소속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는 두 장의 본선행 티켓을 놓고 다퉜으며, 본선 진출의 영예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영국선수권에서 2위에 머무른 스코틀랜드는 자존심을 앞세우며 대회 참가 자격을 스스로 포기해버렸다.

 

스코틀랜드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유럽 국가들의 대회 참가 의지는 전반적으로 높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에 이어 벨기에와 터키가 차례차례 기권했고, 대리 출전 자격을 부여 받은 포르투갈도 피파 측의 제안을 거절했다. 결국 줄 리메 회장은 모국 프랑스를 이 기념비적인 대회에 참가시키려 했지만 이러한 노력마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여기에 남미의 아르헨티나까지 브라질과의 갈등 관계로 참가를 포기하고, 에콰도르와 페루의 기권 등이 이어지면서 1950년 대회 지역예선은 여러모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계속되는 기권이 이어진 결과 대회 출전국도 당초 예정됐던 16개국에서 13개국으로 줄어들었다. 아시아 및 아프리카 국가들 역시 모두 불참한 만큼 대회 전체가 발전하지 못하고 뒤로 퇴보했다는 인상을 남긴 것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룹 대륙 티켓 예선참가국 본선진출국
1 유럽 2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2 유럽 1 터키, 시리아 터키*
3 유럽 1 1R: 유고, 이스라엘
2R: 프랑스, 유고
유고
4 유럽 1 1R: 스위스, 룩셈부르크
2R: 스위스, 벨기에(기권)
스위스
5 유럽 1 스웨덴, 아일랜드, 핀란드 스웨덴
6 유럽 1 스페인, 포르투갈 스페인
7 남미 2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기권) 볼리비아
칠레
8 유럽 2 파라과이, 우루과이, 에콰도르(기권), 페루(기권) 파라과이
우루과이
9 북중미 2 멕시코, 미국, 쿠바 멕시코
미국
10 아시아 1 인도,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인도*

* 스코틀랜드, 터키, 인도 기권. 터키 대신 포르투갈 초청했으나 거절.

 

 

본선 요약

1950년 대회는 토너먼트 방식을 배제하고 2차 풀리그 방식으로 본선을 진행한 유일무이한 월드컵으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이처럼 개최국 브라질이 2차 풀리그 방식을 고집한 이유는 자국 내 축구 열기를 고려, 경기수를 최대한으로 늘려 입장 수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였다. 당초 예정대로 16개국이 월드컵에 참가한다고 가정했을 때, 2차 풀리그 방식을 도입할 경우 토너먼트 방식에 비해 무려 14경기까지 시합 수를 늘리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회 출전국이 13개국으로 줄어듦에 따라 2차 풀리그 방식은 비합리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A조와 B조에는 정상적으로 4팀이 배정된 반면 C조에는 3팀이, D조에는 2팀이 배정됨으로써 형평성이 어긋났고, A조와 B조 팀들이 불만을 표출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처럼 각 조에 배정된 국가의 숫자가 서로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조 1위 4개 팀이 결선리그에 합류하는 기존 방식에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진행 방식의 최대 수혜자는 2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초대 챔피언 우루과이였다. 우루과이는 남미 최약체 볼리비아와 단 둘이 D조에 편성되는 행운의 대진표를 부여 받았고, 볼리비아를 8-0으로 완파하며 별다른 체력소모 없이 결선리그에 합류하는 혜택을 누렸다. 반면 브라질, 스페인, 스웨덴 등은 유고, 스위스, 잉글랜드, 이탈리아 등과 1라운드부터 치열한 혈투를 벌여야 했다. 그럼에도 결선리그의 초반 분위기를 장악한 팀은 개최국 브라질이었다. 지지뉴, 아데미르, 자이르 등을 앞세워 스웨덴을 7-1로, 스페인을 6-1로 대파한 브라질은 이미 우승을 예약해 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브라질은 우루과이와의 최종전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1-2 역전패를 당했고, 이 패배로 인해 우승컵마저 우루과이에 헌납해야 했다. 브라질 사람들은 이 충격적인 준우승을 ‘마라카낭의 비극’이라 부르며 오래도록 후유증에 시달렸다.

 

 

 

 

주요 선수

1950년 대회는 ‘마라카낭의 비극’이 있기 전까지 개최국 브라질 선수들의 독무대나 다름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난 별 중의 별은 지지뉴와 아데미르였다. 오늘날의 플레이메이커에 가까운 임무를 부여받은 지지뉴는 천부적인 테크닉과 날카로운 패싱력을 앞세워 스웨덴과 스페인을 연파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해냈고, 아데미르의 폭발적인 득점포 역시 화려하게 50년 대회를 수놓았다. 그러나 최후에 미소 지은 승리자는 우루과이의 후안 스키아피노였다. 지지뉴에 대항할 우루과이의 에이스이자 리더로서 팀을 진두지휘한 스키아피노는 브라질과의 최종전에서 귀중한 동점골을 성공시키는 등 높은 공헌도를 나타냈다. 스키아피노와 함께 결승전에서 맹활약 한 우측 공격수 기지아, 주장 바렐라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우루과이 우승의 주역들로 손꼽혔다.

 

스페인에서는 라 리가 역대 최다 득점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공격수 텔모 사라와 호수비를 연발한 호세 파라가 이 대회를 통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반면 잉글랜드의 전설적인 영웅들로 손꼽히는 스탠리 매튜스와 빌리 라이트는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는 데 실패했으며, 조별리그에서 탈락의 수모를 당하는 등 여러모로 혹독한 월드컵 데뷔전을 치렀다.

 

 

수상 기록

MVP
1위 지지뉴(브라질)
2위 후안 스키아피노(우루과이)
3위 아데미르(브라질)

 

득점
1위 아데미르(브라질/8골).
2위 오스카르 미게스(우루과이/5골), 에스타니슬라오 바소라(스페인/5골).
4위 텔모 사라(스페인/4골), 치쿠(브라질/4골), 알시데스 기지아(우루과이/4골).

 

베스트 팀
골키퍼: 로케 마스폴리(우루과이).
수비수: 에릭 닐손(스웨덴), 호세 파라(스페인), 바우어(브라질).
미드필더: 빅토르 안드라데, 오브둘리오 바렐라(이상 우루과이).
공격수: 지지뉴, 아데미르, 자이르(이상 브라질), 알시데스 기지아, 후안 스키아피노(이상 우루과이).

 

 

브라질 월드컵 이모저모

01

1950년 대회는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12년 만에 재개된 월드컵이다. 1934년, 1938년 대회가 2회 연속으로 유럽에서 개최됐을 뿐 아니라, 전쟁 피해로 인해 유럽 국가들의 월드컵 개최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짐에 따라 이 대회 유치권을 놓고 남미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경쟁을 벌였다.

02

피파는 1950년 대회 개최국을 브라질로 결정하는 한편, 그 다음 1954년 대회 개최국을 스위스로, 1958년 대회 개최국을 스웨덴으로 결정하겠다는 방침을 동시에 발표했다. 이는 전후 피해가 막대했던 유럽 국가들에게 충분한 준비 기간을 확보해주기 위해서였다.

03

또한 피파는 줄 리메 회장의 취임 25주년을 맞이하여 월드컵 축구대회의 공식 명칭을 ‘줄리메컵 세계축구선수권대회’로 변경, 그 공적을 기렸다. 참고로 이 명칭은 줄리메컵이 브라질의 영구 소유로 넘어가는 1970년 대회까지 20년 동안 유지됐으며, 1974년 대회부터는 지금의 ‘피파 월드컵(FIFA World Cup)’이란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04

한편 1950년 대회에 이르러 마침내 선박이 아닌 비행기로 선수들이 이동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월드컵 참가를 위해 무려 2주 이상을 항해해야 했던 1930년대와 대조적으로, 출전국 선수들은 보다 쾌적하고 편안하게 유럽과 남미 양 대륙을 오갈 수 있었다.

05

브라질은 1950년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약 2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마라카낭 스타디움(Estádio do Maracanã)을 건축했다. 이 구장은 오늘날 브라질 축구계의 ‘성지’로 추앙받고 있으며, 1992년에 일어난 관중 추락사고 이후에는 100% 좌석으로 개조하여 약 8만 명을 수용하는 신식 구장으로 거듭났다.

06

사실상의 결승전이었던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결선리그 최종전 또한 바로 이 구장에서 치러졌다. 브라질은 이 경기에서 믿기 힘든 1-2 역전패를 당했고, 사람들은 이 충격적인 패배와 1950년 대회 준우승을 가리켜 ‘마라카낭의 비극(Maracanaço)’이라 불렀다.

07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최종전에는 공식적으로 199,854 명의 관중이 마라카낭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수 백 명 이상이 출입구를 부수고 경기장 안으로 난입하는 등 실제로는 20만에서 25만 정도의 관중이 이 경기를 관람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08

이 최종전이 믿기 힘든 우루과이의 2-1 역전승으로 마무리 되자 마라카낭 스타디움은 완전 침묵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피파의 줄 리메 회장은 그 때의 현장감을 “온 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의 적막감” 이라 회상했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린 뒤에는 관중 2명이 자살로, 2명이 심장 마비로 사망했고, 그 외에도 수 십 명이 실신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우루과이는 우승컵 수여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황급히 경기장을 빠져나가야 했다.

09

이 패배 후 브라질 주택가의 곳곳에는 조기가 계양됐고, 우울증에 시달린 몇몇 팬들이 자살하는 사태가 끊이지 않았다. 일부 기자들과 해설가들은 아예 사표를 내고 축구계에서 은퇴했으며, 바르보사 골키퍼를 비롯한 최종전 패배의 주범들은 거의 범죄자 취급을 당하기까지 했다. 바르보사를 비롯, 수비수 아우구스투와 후베날, 비고데 등은 결국 1950년 월드컵 이후 두 번 다시 대표팀 유니폼을 입지 못했다.

10

브라질 축구협회는 ‘마라카낭의 비극’과 같은 재앙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대표팀 유니폼 색깔도 공식적으로 변경했다. 이전까지 브라질은 흰 바탕의 상하의에 푸른 에리가 달린 유니폼을 오래도록 착용해 왔으나, 1950년 월드컵을 끝으로 이 유니폼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브라질은 이때부터 지금과 같은 노란색 계열의 유니폼을 국가의 새로운 상징으로 삼았다.

11

브라질의 최종전 패배와 함께 잉글랜드의 미국전 패배 및 조별리그 탈락도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최대 이변으로 손꼽히고 있다. 월드컵 무대에 처음으로 얼굴을 내민 종주국 잉글랜드는 대회 최약에 미국에 0-1로 무릎을 꿇는 한편, 스페인에게도 패배를 당해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12

당시 미국은 대학생과 아마추어 선수들, 혹은 영국 이민계 선수들로 급조된 팀을 1950년 월드컵에 내보냈는데, 사람들은 이 미국 팀을 ‘투포환 선수들(Shot Putters)’이라 비웃으며 조롱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잉글랜드 사람들은 미국에 0-1로 패배했다는 신문 기사를 10-1의 오보인 줄 착각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