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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유럽 | 2 |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 |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
2 | 유럽 | 1 | 터키, 시리아 | 터키* |
3 | 유럽 | 1 | 1R: 유고, 이스라엘 2R: 프랑스, 유고 |
유고 |
4 | 유럽 | 1 | 1R: 스위스, 룩셈부르크 2R: 스위스, 벨기에(기권) |
스위스 |
5 | 유럽 | 1 | 스웨덴, 아일랜드, 핀란드 | 스웨덴 |
6 | 유럽 | 1 | 스페인, 포르투갈 | 스페인 |
7 | 남미 | 2 |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기권) | 볼리비아 칠레 |
8 | 유럽 | 2 | 파라과이, 우루과이, 에콰도르(기권), 페루(기권) | 파라과이 우루과이 |
9 | 북중미 | 2 | 멕시코, 미국, 쿠바 | 멕시코 미국 |
10 | 아시아 | 1 | 인도,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 인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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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
1950년 대회는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12년 만에 재개된 월드컵이다. 1934년, 1938년 대회가 2회 연속으로 유럽에서 개최됐을 뿐 아니라, 전쟁 피해로 인해 유럽 국가들의 월드컵 개최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짐에 따라 이 대회 유치권을 놓고 남미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경쟁을 벌였다. |
02 |
피파는 1950년 대회 개최국을 브라질로 결정하는 한편, 그 다음 1954년 대회 개최국을 스위스로, 1958년 대회 개최국을 스웨덴으로 결정하겠다는 방침을 동시에 발표했다. 이는 전후 피해가 막대했던 유럽 국가들에게 충분한 준비 기간을 확보해주기 위해서였다. |
03 |
또한 피파는 줄 리메 회장의 취임 25주년을 맞이하여 월드컵 축구대회의 공식 명칭을 ‘줄리메컵 세계축구선수권대회’로 변경, 그 공적을 기렸다. 참고로 이 명칭은 줄리메컵이 브라질의 영구 소유로 넘어가는 1970년 대회까지 20년 동안 유지됐으며, 1974년 대회부터는 지금의 ‘피파 월드컵(FIFA World Cup)’이란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
04 |
한편 1950년 대회에 이르러 마침내 선박이 아닌 비행기로 선수들이 이동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월드컵 참가를 위해 무려 2주 이상을 항해해야 했던 1930년대와 대조적으로, 출전국 선수들은 보다 쾌적하고 편안하게 유럽과 남미 양 대륙을 오갈 수 있었다. |
05 |
브라질은 1950년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약 2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마라카낭 스타디움(Estádio do Maracanã)을 건축했다. 이 구장은 오늘날 브라질 축구계의 ‘성지’로 추앙받고 있으며, 1992년에 일어난 관중 추락사고 이후에는 100% 좌석으로 개조하여 약 8만 명을 수용하는 신식 구장으로 거듭났다. |
06 |
사실상의 결승전이었던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결선리그 최종전 또한 바로 이 구장에서 치러졌다. 브라질은 이 경기에서 믿기 힘든 1-2 역전패를 당했고, 사람들은 이 충격적인 패배와 1950년 대회 준우승을 가리켜 ‘마라카낭의 비극(Maracanaço)’이라 불렀다. |
07 |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최종전에는 공식적으로 199,854 명의 관중이 마라카낭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수 백 명 이상이 출입구를 부수고 경기장 안으로 난입하는 등 실제로는 20만에서 25만 정도의 관중이 이 경기를 관람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08 |
이 최종전이 믿기 힘든 우루과이의 2-1 역전승으로 마무리 되자 마라카낭 스타디움은 완전 침묵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피파의 줄 리메 회장은 그 때의 현장감을 “온 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의 적막감” 이라 회상했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린 뒤에는 관중 2명이 자살로, 2명이 심장 마비로 사망했고, 그 외에도 수 십 명이 실신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우루과이는 우승컵 수여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황급히 경기장을 빠져나가야 했다. |
09 |
이 패배 후 브라질 주택가의 곳곳에는 조기가 계양됐고, 우울증에 시달린 몇몇 팬들이 자살하는 사태가 끊이지 않았다. 일부 기자들과 해설가들은 아예 사표를 내고 축구계에서 은퇴했으며, 바르보사 골키퍼를 비롯한 최종전 패배의 주범들은 거의 범죄자 취급을 당하기까지 했다. 바르보사를 비롯, 수비수 아우구스투와 후베날, 비고데 등은 결국 1950년 월드컵 이후 두 번 다시 대표팀 유니폼을 입지 못했다. |
10 |
브라질 축구협회는 ‘마라카낭의 비극’과 같은 재앙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대표팀 유니폼 색깔도 공식적으로 변경했다. 이전까지 브라질은 흰 바탕의 상하의에 푸른 에리가 달린 유니폼을 오래도록 착용해 왔으나, 1950년 월드컵을 끝으로 이 유니폼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브라질은 이때부터 지금과 같은 노란색 계열의 유니폼을 국가의 새로운 상징으로 삼았다. |
11 |
브라질의 최종전 패배와 함께 잉글랜드의 미국전 패배 및 조별리그 탈락도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최대 이변으로 손꼽히고 있다. 월드컵 무대에 처음으로 얼굴을 내민 종주국 잉글랜드는 대회 최약에 미국에 0-1로 무릎을 꿇는 한편, 스페인에게도 패배를 당해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
12 |
당시 미국은 대학생과 아마추어 선수들, 혹은 영국 이민계 선수들로 급조된 팀을 1950년 월드컵에 내보냈는데, 사람들은 이 미국 팀을 ‘투포환 선수들(Shot Putters)’이라 비웃으며 조롱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잉글랜드 사람들은 미국에 0-1로 패배했다는 신문 기사를 10-1의 오보인 줄 착각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
1958년 제6회 스웨덴 월드컵 (0) | 2011.0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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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제5회 스위스 월드컵 (0) | 2011.05.01 |
1938년 제3회 프랑스 월드컵 (0) | 2011.05.01 |
2회 1934년 제2회 이탈리아 월드컵 (0) | 2011.05.01 |
1회 1930년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 (0) | 2011.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