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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근대철학 - 경험론과 합리론 <1>

古典의 향기

by 巡禮者 2012. 5. 12.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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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근대철학 - 경험론과 합리론 <1>

 

. 과학혁명과 근대의 도래

 

-과학혁명

 

근대의 성립에 더욱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과학혁명일 것이다. 중세의 과학은 전통적인 과학의 답습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과혁학명 시대의 과학자들은 '관찰'과 '가설'의 수립을 통하여 자연 질서에 대한 전통적 견해에 의문을 표시하였다. 그결과 과학자들은 중세까지의 과학적 이론은 경험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사물의 피상적인 모습에 현혹되지 않고 그 근원을 탐구할 때 과학은 새로운 설명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도 갖게 되었다. 이제 과학자들은 옛 철학자들의 이론과 신학자들의 설명에 만족하지 않고 사물과 우주의 법칙을 그들의 손으로 발견하고자 했다.

 

 

N. Copericus (1473~1543)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저작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를 완성 짓고도 13년간 감추어두었다가 1543년, 즉 자신이 숨지던 해에야 출판한다. 죽음에 직면해서야 용기를 낸 것이다. 그것도 친구에게 자기 저작의 개요를 보여준 뒤, 친구가 먼저 비슷한 책을 내고도 처벌받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용기를 냈다. 덕분에 그는 아무 처벌을 받지 않았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이단으로 몰려 수난을 당해야 했다.

<화형을 당할때도 그는 떨지 않았다>중, 한만수, 프레시안, 2012.04.19

 

 

과학혁명의 시발점은 1543년 출간된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일 것이다. 이 책에서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부인하고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태양중심설'을 주장한다. (물론 기원전에 아리스타르코스가 지동설을 주장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학설은 신학자들에 의해 이단적인 과학으로 취급받았다.) 그는 여러가지 과학적 근거를 내세워 태양중심설의 정당성을 주장함으로써 지구는 모든 천체를 거느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그저 수많은 태양들 가운데 하나에 붙어있는 조그만 행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케플러 J. Kepler(1571~1630)

 

덴마크 천문학자인 티코 브라헤의 조수로 오랫동안 일했던 케플러는 수학적인 계싼을 행하고 지구에 대한 다른 행성들의 위치를 계속 관찰한 결과 태양을 도는 해엉들의 궤도가 코페르니쿠스가 믿었던 것처럼 원형이 아닌 타원형이며 행성들의 운동 속도가 일정하지 않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해성운동의 법칙성은 일정시간 도안 행성이 그려내는 타원형 내의 부채꼴의 면적이 항상 같다는 점에 있었다. 또한 공전주기의 태양과 행상 사이의 평균 거리에 대한 법칙을 수립함으로써 자연의 구조를 엄격한 수학 공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것은 자연현상을 '수학적 합리성'을 통하여 설명하는 것이 신에 의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로써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흔들리지 않는 반석에 오르게 된다.

 

갈릴레이 Galileo Galilei(1564~1642)

 

갈릴레이는 직접적인 관찰의 중요성을 깨닫고 스스로 망원경을 제작하여 달을 관찰하는가 하면 목성이 가진 네 개의 위성을 발견했고 물체의 운동과 가속도에 대한 수학적 공식을 수립해내기도 한다. 그는 천문학에 기하학적 정확성을 적용함으로써 천체의 운동이 기하학적 공리와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우리가 감각적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은 불충분하고 주관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수학적 합리성을 적용함으로써, 정확히 파악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갈릴레이은 근대의 합리주의를 개척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대의 과학이 제기한 이성과 감각의 문제, 경험과 실재의 문제는 철학에 이어져 근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된다. 신에게서 벗어난 인간의 시대는 과학혁명을 통해 비로소 출발한다.

 

2. 합리론의 창시자 데카르트

 

 

Rene Descartes (1596~1650) 합리론 철학의 창시자

 

 

프랑스 중부 투렌 지방에서 귀족의 후예로 태어나 1년만에 어머니를 여읨. 10에 예수회 학교에 들어가 수학, 논리학,철학을 공부했고 프와티에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 성년이 되자 세상을 두루 여행하다. 그는 입대해 종교전쟁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1628년 자유로운 연구가 가능했던 네덜란드에 정착해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게 된다.

 

1637년 『방법서설』을 추간하고 1641년『성찰』을 내놓음으로써 새로운 철학적 시스템을 정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대륙의 합리론'의 출발점이 된다.

데카르트의 명성이 높아지자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은 1649년 철학을 배우기 위해 그를 초청한다. 하지만 여왕을 가르치기 위해 매일 새벽에 일어나야 했고 북유럽의 추운 날씨에 적응하지 못해 1650년 폐렴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만다.

 

폐렴’으로 숨졌다는 스웨덴 궁정의 공식성명에도 불구하고,  당시 스톡홀름시에는 데카르트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소문을 뒷받침하는 것은 당시 여왕의 주치의이자 명의였던 요한 반 불렌이  자신의 동료의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묘사한 병의 진행과정이었다.  

 

그 편지에 의하면, 데카르트는 딸꾹질을 하고, 밤색을 띤 가래를 토해내고,

호흡을 불규칙하게 눈동자를 이리 저리 움직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증세는 폐렴보다는 비소중독으로 의심된다. 폐렴으로 죽었던, 비소 중독에 의해 죽었던 간에 데카르트의 죽음은 많은 의문을 남긴다. 데카르트가 죽고 나서 샤뉘 프랑스 대사가 손수 작성한 묘비문에서도 그러한 의문점이 발견된다.

“그는 철학을 그 기초에서부터 혁신하였으며,

언젠가는 죽을 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자연의 가장 깊은 내면에로 이르는 길,

새롭고 분명하고도 안전한 길을 제시하였다… 는 그를 시기하는 자들을 그의 죄 없는 생명으로 속죄하였다.”

 

출처:시민사회신문 [철학여행카페 36,37 데카르트는 살해됐는가],이동희

 

- 진리를 찾기 위해 의심하는 방법 : 방법적 회의

 

르네상스 시기 고대의 회의주의가 부활한 배경에는 독단론과 광신론에 빠지지 않기 위한 건전한 회의주의였다. 이러한 회의의 정신은 데카르트에게도 이어진다. 데카르트가 회의주의에서 받아들인 것은 방법으로서의 회의였다. 그는 회의의 방법을 통해 좀더 적극적으로 '진리'에 도달하고자 했다. 데카르트는 철저히 의심한다.  그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철저히 의심했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이전에 '참'이라고 믿었던 것 중에서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의심의 끝까지 나아간 데카르트는 그 의심에서 벗어나 단 한가지의 확실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을 통하여 철학을 성립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렇게 의심을 거듭한 데카르트는 결국 단 한가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자신이 지금 '의심한다'는 사실이다.

 

무엇을 의심하고 있건 지금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의심하는 그 순간 누군가 지금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의심한다는 것은 누군가 있어야 성립하는 것이므로 그러한 '의심'과 의심하는 사람의 '존재'는 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명제가 나온다. 어떠한 회의로도 의심할 수 없는 이 사실은 데카르트 철학에서 제1원리로 작용하여 다른 모든 지식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출발점이 된다.

 

- 두 가지 방법 : 직관과 연역

 

직관은 의심할 것이 전혀 없는 지적인 통찰이다.그것은 겅험을 통한 인식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한 경험적 인식은 종종 착각을 일으켜 정신에 혼란을  일으키지만 직관은 맑은 정신을 통하여 어떠한 의심도 일으키지 않는 명석하고 판명한 지식을 제공한다. 직관은 참다운 지식을 얻도록 하는데, 그 기준은 지식의 '명석판명함'이다. 여기서 명석함이란 맑은 정신속에 분명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도저히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고 판명함이란 다른 지식들과 분명하게 구분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직관적 지식은 도저히 의심할 수 없기 때문에 딱히 증명이 필요없는 '공리'를 만들어낸다.

 

공리의 생산은 구체적인 지식으로 연결되는데 그것이 바로 연역의 과정이다. 연역을 통하여 비로소 다양한 지식의 생산이 가능해진다. 연역이란 공리와 같은 확실한 사실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라고 적힌 책을 밟고 있는 데카르트

 

데카르트는 이러한 연역을 통하여 자신의 철학을 만들어간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과는 다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전제를 통하여 논리를 이끌어 간다. 스콜라철학은 이러한 삼단논법을 구사했는데 이것은 전제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했기 때문에 공리라고 부르기 힘든 것이다. 반면에 데카르트의 연역은 확실한 사실에서 출발한다. 데카르트는 진리에서 출발하여 다른 진리를 연역해낸다. (스콜라철학의 신의 존재증명은 전제에 권위를 부여하면서 시작한다.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 증명을 시도한다.  이것을 교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데카르트 수배령이 내려지기도 했다고 한다.)

 

데카르트는 그이 책은 『방법서설』에서 네 가지 규칙을 정한다.

 

첫째 어떤 의심도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을 참으로 인정한다.

둘째 여러 문제들을 가능한 한 작은 부분으로 나누어본다.

셋쩨 단순하고 쉬운 대상들에서 출발하여 복잡한 대상들로 사유를 진전시키고

넷째 아무 것도 빠진 것 없이 완벽하게 열거하여 전체의 모습을 그려간다.

 

이것이 데카르트가 진리를 발견하는 방식인데 이 방식이야말로 대상들을 체계적으로 배열하고 위치시키는 원칙이다.

 

-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

 

데카르트는 직관을 통해 세계와  존재에 대한 지식을 수립해낸다. 그에게 신의 존재는 필연적인 것이다. 데카르트에게 우리의 정신 속에 있는 '신'이라는 관념은 '무한하고 영원하며, 불변적이고 전능한, 모든 존재들을 창조한 실체'이다.

이러한 관념은 유한한 '나'라는 존재안에서 만들어질 수가 없다. 때문에 완전하고 영원한 존재인 신이라는 관념은 '나'라는 존재 외부에 있는 완전한 존재인 신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다.

 

이렇게 신의 존재를 증명한 데카르트는 신이 창조한 세계에 대한 지식에 인간이 도달 가능하다고 말한다. 인간의 지성은 세계를 창조한 신에게서 온 것으로 '명석판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한 긍정을 통하여 사물의 존재를 긍정한다. 인간의 정신과는 별개로 사물이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되는데 데카르트는 물질적 대상에 대한 관념도 역시 물질적 대상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결국 인간정신과 신의 확실한 존재를 통해 사물의 존재 자체를 긍정해야한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주장이다. 이러한 확신속에서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나오는데, 물질과 정신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즉 물질은 정신에서 나올 수 없고 정신 또한 물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은 '사유thought'를 그 특징으로 하는 존재이고 물질은 '연장extension'을 가지는 존재이다. 아무리 작은 물질이라도 어느 정도의 공간은 차지하고 있기에 그것은 '연장'을 가지는 것이다. 정신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 물질의 세계는 기하학적으로 구성되어 기계적인 법칙을 따른다.

 

데카르트에게 물질의 세계는 순수하게 기하학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물질의 운동은 기하학에 의해 표현되고 설명된다고 보았다. 데카르트에게 물질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는 서로 다른 독립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그것이 상호작용한다는 것은 모순적인 것이 된다.

 

데카르트의 합리론은 철학의 지형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르네상스 이후 계속 문제시되었던 인간 이성에 대한 철학적 고찰의 문제는 데카르트에 와서 체계적으로 설명돈다. 그는 기하학의 원칙을 인간 정신과 물질세계에 적용함으로써 경험이 아닌 이성을 통해서 존재를 파악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일관된 철학을 수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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