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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생각] (497) “천국은 작고 순수한 이들의 것”/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0.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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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생각] (497) “천국은 작고 순수한 이들의 것”/배광하 신부

연중 제26주일 (마태오 18, 1~5) :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
발행일 : 2006-10-01 [제2519호, 6면]

- 순수함과 작아짐 -

순수함

“어린이들을 돌보는 것은 천체 우주 망원경의 렌즈를 닦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일의 세대인 어린이들을 제대로 돌보아야만, 저 드넓은 미래의 시야가 바로 보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의 예수님께서 “천국은 어린이와 같은 이들의 것이다” 하신 말씀은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이들의 것이란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린이를 돌본다는 것이 과연 천체 우주 망원경의 렌즈를 닦듯이 미래의 발전된 세상을 향한 돌봄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린이들의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어른이, 부모들이 오히려 깨뜨리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영악스러워 지고 더욱 이기적이고 더욱 계산적인 경쟁 속에 내팽개쳐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가 걸맞지 않게 느껴지는 오늘의 우리 마음입니다.

제 자신은 “가끔 세상이 이토록 삭막해지는 것은 인간이 달나라에 발을 내딛고 난 다음부터이다”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달에는 계수나무가 있어야하고 옥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어야 합니다. 신화는 신화로, 동화는 동화로, 전설은 전설로 남아있어야 하며, 신비는 신비로 살아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큰 슬픔은 신비의 순수함이 사라지는데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류의 미래라 할 수 있는 어린이들의 순수함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슬픔입니다. 이 또한 어른들의 책임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 어린이의 순수함을 잃지 않으셨던 오늘 축일의 주인공이신 소화 데레사 성녀의 삶은(1873~1897) 또 다른 일깨움을 우리에게 준다고 하겠습니다.

열 다섯 살 나이에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여 스물 네 살에 세상을 떠나시기까지 온전히 작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셨던 성녀의 삶은 ‘낮아짐과 사랑’이셨습니다. 어린 시절 첫 영성체 때, “나는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께‘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영원히 당신께 바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라는 약속을 죽는 그 순간까지 지켰던 성녀는 마지막에도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로 끝맺음 하셨습니다.

작아짐과 순수함을 잃지 않을때 나올 수 있는 기쁨의 삶, 천국의 삶인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마지막으로 이 같은 말씀도 남기셨습니다.

“나는 지상에서 선을 행하면서 나의 천국을 지내고 싶습니다.”

그렇듯 자신을 끊임없이 비우면서 작아짐의 삶을 사셨기에 지상에서 천국을 사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사셨기 때문에 그 같은 삶이 가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마태 18, 4)

작아짐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자주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꿈을 잃어버리며 살고 있습니다. 더욱 많은 재물을 쌓으려 하고, 더욱 많은 고집 속에 포기하지 않으려 하고, 더 큰 욕망의 울타리에 자신을 가두면서 끝내 그곳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불행한 삶을 스스로 자초하며 삽니다. 때문에 사도 바오로께서는 이 세상 온갖 부귀영화와 영예가 결코 영원하지 않기에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 것을 간곡히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7, 31)

그러므로 사라질 세상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계실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하느님 영광의 나라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이리라.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이사 66, 12)

이 같은 약속이 계심에도 우리는 자주 나를 내세우고 내 것을 포기하지 않으며 주님의 자리에 세상 것을 두었습니다. 때문에 시련인 것이고,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기쁨과 참 평화는 우리를 향하여 팔 벌리고 있었건만 우리가 외면하였던 것입니다.

잊지 않아야 하는 진리는, 교만은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최초의 인간이 에덴 낙원을 포기하게 된 것도 실은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하였던 교만이었습니다.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칠죄종의 첫 자리를 차지하는 죄도 역시 교만입니다. 교만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는 하느님 은총의 구원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꼴찌가 되어야 하고 자신을 낮추는 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1코린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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