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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3) 통일을 꿈꾸며/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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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3) 통일을 꿈꾸며/배광하 신부

남북통일 기원 미사 (마태오 18, 19~22) : 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
발행일 : 2007-06-24 [제2555호, 6면]

- 남북이 하나 되는 감격의 그날 -

흩어진 것을 모으시는 주님

신학생 시절 군사독재 정권 때 가슴 뜨겁게 부르던 노래가 생각납니다.

“해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켜쥔 뜨거운 흙이요.” ‘광야에서’라는 노래입니다.

오늘 교회는 남북통일 기원미사의 본기도에서 이렇게 청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시고 모인 사람들을 지켜 주시니, 갈라진 저희 민족을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평화 통일을 이루어 주시고, 흩어진 가족들이 한데 모여 기쁘게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애당초 하나가 아니었다면 갈라질 수도 없습니다. 갈라져 나간 것을 다시 하나가 되도록 만드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먼저 움직이지 않으시고 우리의 간절한 염원과 그 염원에 부합되는 행동을 우리가 먼저 보이기를 원하십니다.

진정 해 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백두에서 한라까지 우리 동포들이 하나 되는 뜨거운 감격의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변화된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 첫 번째 자세를 사도 바오로는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 31~32)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간 남북은 이가 갈릴 정도로 악의를 가지고 분노하였고 원한에 쌓여 있었습니다. 그 같은 분노와 격분을 위정자들은 교묘히 정권연장의 도구로 이용하였던 것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가 될 수 없었고, 우리들 마음에도 굳이 하나가 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우는 아이 젖 한 번 더 물린다.’ 하였는데, 우리는 애가 타게 울지도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남북이 분단된 상태가 오늘에 이르도록 방치한 씻을 수 없는 죄를 함께 지었습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갈라진 운명에 가슴 치며 통곡하고 반성할 때, 분명 하나가 되게 해 주실 수 있으신 주님의 약속을 잊고 있었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또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 버리신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신명 30, 3)

일치를 위한 삶

남북이 하나 되는 크나큰 대망 앞에서 우리는 자주 쓰디쓴 좌절감을 맛보게 됩니다. 그것은 나라 전체가 하나가 되는 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장애자 재활원을 만들기 위한 소중한 뜻을 가진 분들의 비애감을 들었습니다. 시골 구석 구석의 모든 마을들이 절대 반대를 외쳤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을에 장애자 재활 시설이라니, 절대 허락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자식이 장애아라면 그럴 수 있을까 싶습니다. 지방 자치화 시대가 되면서 이제는 더욱 하나가 될 수 없는 슬픈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같은 모습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본당 위주로 성을 쌓고 담을 쌓아 갑니다. 가정에서의 분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가운데 반세기가 넘도록 갈라진 이 민족에게 통일이 올 그날을 꿈꿀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가슴이 답답해 옵니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다른 기도에 앞서 하나 됨을 그토록 아버지 하느님께 간청 하셨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 11)

남북의 통일을 기원하며 통일의 모델이 되는 구약의 요셉을 떠올려 봅니다. 그는 형들의 미움을 사 이집트로 팔려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숱한 죽을 고비를 넘기며 끝내는 이집트 제2의 실권자가 됩니다.

그러나 기근이 들어 초라한 모습으로 찾아온 용서 못할 형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형들의 뉘우치는 마음을 읽은 요셉은 시종들을 바깥으로 내 보낸 뒤 북받치는 감정을 누를 길 없어 큰소리로 웁니다. 그 울음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이집트 전역에서 들을 수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화해와 용서, 맺힌 응어리와 한이 모두 풀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울음이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가슴 벅찬 감격의 모습입니다. 우리 또한 남북의 형제들이 서로 용서하여 부둥켜안고 실컷 울 수 있는 통일의 그날을 꿈꾸어 봅니다. 그날이 빨리 올 수 있는 길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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