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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제11회 아르헨티나 월드컵

스포츠/월드컵

by 巡禮者 2011. 5. 1.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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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1978년 월드컵은 남미의 아르헨티나에서 6월 1일부터 6월 25일까지 총 25일간 치러졌다. 이 대회는 개최국 아르헨티나의 불안한 치안 및 군사정권의 횡포로 인해 참가국들에 불안감을 조성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격동의 월드컵’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아르헨티나를 향한 홈 관중들의 응원은 거의 광기에 가까웠는데, 이에 힘입어 아르헨티나는 오랜 무관의 역사를 깨고 사상 첫 우승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개최국과 대회기간: 아르헨티나, 1978년 6월 1일~6월 25일
참가국: 16개국
총 득점: 38경기 102골, 평균 2.68
총 관중: 1,546,151명, 평균 40,688
우승국: 아르헨티나(통산 1회)

 

 

지역예선

지난 1974년 대회보다도 더욱 늘어난 104개국이 참가를 신청, 총 251경기에 달하는 지역예선전이 1년 이상에 걸쳐 진행됐다. 전 대회와 마찬가지로 유럽에 9.5장(우승국 서독 포함), 남미에 3.5장(개최국 아르헨티나 포함), 북중미에 1장, 아프리카에 1장, 아시아·오세아니아에 1장의 티켓이 주어졌으며, 유럽 9조 1위 팀과 남미 최종예선 3위 팀은 최후의 1장을 놓고 플레이오프를 치렀다.

 

지난 대회의 시스템을 유지함에 따라 강호들이 즐비한 유럽 지역예선에서는 다시 한 번 전쟁을 방불케 하는 자리다툼이 벌어졌다. 그 결과 잉글랜드가 이탈리아에 밀려 2회 연속 본선 진출에 실패하는 수모를 당했고, 유로 1976 우승팀 체코와 전통의 강호 소련, 그리고 포르투갈 등도 지역예선에서 고배를 마시는 아픔을 감수했다. 강호들의 대거 탈락이 반복되자 유럽축구연맹(UEFA)의 불만은 사실상 극에 달했다. 여기에 수많은 국가들이 단 1장의 티켓을 놓고 경쟁을 펼쳐야 했던 북중미, 아프리카, 아시아 등도 출전권 확대를 요구하고 나섰다. 결국 피파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1982년 대회부터 본선 진출국을 16개국에서 24개국으로 늘려야 했다.

 

그룹 대륙 티켓 예선참가국 본선진출국
1 유럽 1 폴란드, 포르투갈, 덴마크, 키프러스 폴란드
2 유럽 1 이탈리아, 잉글랜드, 핀란드,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3 유럽 1 오스트리아, 동독, 터키, 몰타 오스트리아
4 유럽 1 네덜란드, 벨기에, 북아일랜드, 아이슬란드 네덜란드
5 유럽 1 프랑스, 불가리아, 아일랜드 프랑스
6 유럽 1 스웨덴, 노르웨이, 스위스 스웨덴
7 유럽 1 스코틀랜드, 체코, 웨일즈 스코틀랜드
8 유럽 1 스페인, 루마니아, 유고 스페인
9 유럽 0.5 헝가리, 소련, 그리스
* 플레이오프: 헝가리 6-0 볼리비아, 볼리비아 2-3 헝가리
헝가리
10 남미 2.5 A조: 브라질, 파라과이, 콜롬비아
B조: 볼리비아,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C조: 페루, 칠레, 에콰도르
최종: 브라질, 페루, 볼리비아
* 플레이오프: 헝가리 6-0 볼리비아, 볼리비아 2-3 헝가리
브라질
페루
11 북중미 1 멕시코, 아이티, 엘살바도르, 캐나다, 과테말라, 수리남 멕시코
12 아프리카 1 최종예선: 튀니지, 이집트, 나이지리아 튀니지
13 아시아·오세아니아 1 최종예선: 이란, 대한민국, 쿠웨이트, 호주, 홍콩 이란

 

 

본선 요약

지난 1974년 대회와 마찬가지로 2차리그 제도를 고스란히 유지했다. 16개 팀을 4개 조로 구분하여 조별리그를 치르고, 각 조 1, 2위 팀이 다시 2개 조로 나위어 2차리그를 치르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2차리그 이후에는 2개 조 1위 팀이 결승전을, 2위 팀이 3·4위전을 치렀으며 토너먼트 방식은 도입되지 않았다. 또한 피파는 이 대회를 통해 승부차기 규정을 새롭게 도입, 120분 경기가 무승부로 마무리 될 경우 승부차기로써 승자를 가려내도록 했다. 그러나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3·4위전, 아르헨티나와 네덜란드의 결승전이 모두 120분 안에 승패가 결정남에 따라 이 대회에서는 승부차기가 진행되지 않았다. 참고로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승부차기는 1982년 대회 4강전(서독-프랑스)에서 치러졌다.

 

한편 1978년 월드컵에서는 우승후보로 손꼽히던 강팀들이 한 층 약화된 전력으로 대회에 임하는 바람에 화제를 불러 모았다. 전 대회 우승국 서독과 준우승국 네덜란드는 대표팀에서 은퇴한 베켄바워크루이프를 잃은 상태였고, 브라질 역시 젊은 스타 지쿠를 앞세우긴 했지만 세대교체가 완성단계로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 리바, 리베라, 마쫄라 등이 대표팀을 떠난 이탈리아의 경우 과도기적 시기에 놓였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개최국 아르헨티나는 이에 힘입어 대회 초반부터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그러나 2차리그 들어서는 브라질과의 두 번째 경기에서 0-0 무승부를 거두는 바람에 결승 진출 실패 위기로 몰렸다. 두 팀은 나란히 1승 1무를 기록했고, 브라질이 폴란드와의 최종전을 3-1 승리로 장식함에 따라 아르헨티나는 페루를 최소 4-0 이상으로 물리쳐야 했다.

 

당시 쿠비야스가 이끌던 페루는 네덜란드를 따돌리고 D조 1위로 조별리그를 통과할 정도의 강팀이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각각 두 골씩을 터뜨린 켐페스와 루케의 맹활약을 앞세워 믿기 힘든 6-0 완승을 거뒀고, 득실차에서 브라질에 앞서 가까스로 결승까지 진출하는 기쁨을 누렸다. 기세가 오른 아르헨티나는 결승전에서 네덜란드마저 격파하고 사상 첫 우승을 차지했지만, 페루전을 둘러싼 승부조작 의혹은 아직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주요 선수

아르헨티나를 사상 첫 우승으로 이끈 마리오 켐페스는 자타가 공인하는 1978년 대회 최고의 스타였다. 켐페스는 조별리그에서 무득점에 그치며 자국 팬들을 실망시켰음에도 불구, 2차리그부터 무시무시한 득점포를 가동시켜 아르헨티나 우승에 절대적인 공헌을 세웠다. 특히 네덜란드와의 결승전에서는 전반 38분에 선제골을 터뜨렸음은 물론, 천금과도 같은 연장 결승골까지 작렬시켜 아르헨티나 전역을 광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켐페스 이외에는 4골을 터뜨린 레오폴도 루케와 플레이메이커 오스발도 아르딜레스, 그리고 수비수 다니엘 파사레야, 골키퍼 우발도 피욜 등에 대한 평가가 매우 높았다. 특히 루케는 대회 도중 형제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음에도 불구, 강인한 정신력을 앞세워 끝까지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냈다.

 

준우승국 네덜란드에서는 요한 크루이프를 대신하여 에이스 역할을 수행한 롭 렌센브링크의 활약이 가장 돋보였다. 왼발 드리블 돌파 솜씨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실력자였던 렌센브링크는 특히 요니 렙과 절묘한 콤비 플레이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2차리그 서독전과 이탈리아전에서 그림 같은 중장거리 슛을 성공시킨 아리 한 역시 네덜란드를 2회 연속 결승 무대로 이끈 일등공신이었다. 그 밖에 이탈리아의 공격 콤비 로베르토 베테가와 파올로 로씨 역시 전반적인 활약상을 높이 평가받았고, ‘페루의 펠레’ 테오필로 쿠비야스 또한 이 대회를 통해 노익장을 불태웠다. 3위를 차지하며 가능성을 보여준 브라질의 경우 플레이메이커 디르세우가 가장 분투하는 모습을 보인 반면, 지쿠는 쿠치뉴 감독과의 갈등으로 인해 벤치를 뜨겁게 달궈야 했다.

 

 

수상 기록

MVP

1위 마리오 켐페스(아르헨티나)
2위 롭 렌센브링크(네덜란드)
3위 디르세우(브라질)

 

득점
1위 마리오 켐페스(아르헨티나/6골)
2위 롭 렌센브링크(네덜란드/5골), 테오필로 쿠비야스(페루/5골)
4위 레오폴도 루케(아르헨티나/4골), 크랑클(오스트리아/4골)

 

베스트 팀
골키퍼: 우발도 피욜(아르헨티나).
수비수: 베르티 포그츠(서독), 다니엘 파사레야, 알베르토 타란티니(이상 아르헨티나), 루드 크롤(네덜란드).
미드필더: 디르세우(브라질), 테오필로 쿠비야스(페루), 롭 렌센브링크(네덜란드).
공격수: 로베르토 베테가, 파올로 로시(이상 이탈리아), 마리오 켐페스(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월드컵이모저모

01

아르헨티나는 1950년 월드컵 개최권을 브라질에, 1962년 월드컵 개최권을 칠레에, 그리고 1970년 월드컵 개최권을 멕시코에 내주며 번번이 유치 경쟁에서 고배를 들이켜 온 국가다. 그로 인해 1978년 월드컵 성공에 대한 의지가 매우 남달랐으며, 메노티 감독은 대회 3년 전부터 지속적인 합숙훈련까지 실시하며 조직력을 다져나갔다.

02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역시 메노티 감독을 도왔다. 1974년에는 23세 이하 선수의 해외 이적을, 1978년에는 28세 이하 선수의 해외 이적을 전면적으로 금지시켰고, 이미 스페인 발렌시아로 이적해 있던 마리오 켐페스를 대표팀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선수 임대료까지 지불하는 적극성을 나타냈다.

03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염원하던 홈 관중들은 두루마리 휴지 응원으로 이색적인 광경을 연출하는 한편,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를 연호하며 뜨거운 현지 분위기를 조성시켰다. 프랑스의 미셸 플라티니는 훗날 아르헨티나 팬들의 응원구호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04

아르헨티나의 페루전 승부 조작설에 관해서는 아직도 말들이 많다. 세계 각 국의 언론들은 비델라 군사정권이 페루의 부채 5천만 달러를 탕감해주는 조건으로 상대 선수들을 매수했다는 설, 무상으로 3만 톤 이상의 곡물을 페루 측에 전달했다는 설 등을 꾸준히 제기해 왔지만 진위여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05

브라질 역시 페루 측에 아르헨티나전 승리 시 선수 1인당 6만 달러의 상금 지급을 약속했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그 외에도 일부 언론들은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금지 약물 복용 가능성까지 제기했다.

06

페루의 아르헨티나 태생 골키퍼 키로가 또한 일부러 6실점을 허용하며 승부조작을 도왔다는 의혹을 받았다. 그러나 페루 언론들은 “키로가 골키퍼의 선방이 아니었으면 더 많은 실점을 허용했을지도 모른다” 며 그 의혹에 신빙성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07

페루가 아르헨티나에 0-6으로 패한 이후 브라질 팬들은 이 소식에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결국 리우 데 자네이루의 페루 영사관은 흥분한 브라질 팬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08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는 아르헨티나의 불안정한 치안 및 비델라 군사정부의 횡포 등을 이유로 1978년 월드컵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크라이프는 지난 2008년 4월, 카탈루냐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괴한들에게 나를 포함한 가족 모두가 납치되어 생명을 위협 당했던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가족들을 내버려두고 월드컵에 참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며 숨겨 왔던 ‘진짜 이유’를 공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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