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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제12회 스페인 월드컵

스포츠/월드컵

by 巡禮者 2011. 5. 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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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1982년 월드컵은 유럽의 스페인에서 6월 13일부터 7월 11일까지 총 28일간 치러졌다. 본선 출전국이 16개국에서 24개국으로 늘어남에 따라 경기 수, 관중 수, 대회 기간 등 모든 면에서 스케일이 한 층 커졌다. TV 중계 또한 유럽방송연합(EBU) 측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총 89개국이 생중계로 월드컵 경기를 시청할 수 있게 됐다. 이처럼 월드컵은 1982년 대회에 이르러 단순한 세계축구선수권대회라는 범위를 넘어 진정한 지구촌 스포츠 축제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였다.

 

개최국과 대회기간: 스페인, 1982년 6월 13일~7월 11일

참가국: 24개국
총 득점: 52경기 146골, 평균 2.81
총 관중: 2,109,723명, 평균 40,572
우승국: 이탈리아(통산 3회)

 

 

지역예선

본선 출전국이 24개국으로 늘어남에 따라 새롭게 추가된 8장의 티켓은 각 대륙에 고르게 배분됐다. 그 결과 유럽은 9.5장에서 14장으로, 남미는 3.5장에서 4장으로, 그리고 북중미, 아프리카, 아시아·오세아니아는 각각 1장에서 2장으로 출전 티켓이 상향 조정됐다. 피파는 표면적으로 제 3 대륙 팀들의 출전권 확대에 의의를 두는 모습을 보였지만, 실질적인 수혜 대륙은 4.5장의 추가 티켓을 부여 받은 유럽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럼에도 유럽 예선에서는 변함없이 치열한 자리다툼이 일어났다. 잉글랜드, 소련, 체코 등이 12년 만에 월드컵 복귀를 신고하는 등 대부분의 강호들이 본선에 합류했음에도 불구, 전 대회 준우승국 네덜란드는 이변의 소용돌이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70년대 황금기 주역들이 은퇴하며 세대교체에 어려움을 겪은 네덜란드는 프랑스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미셸 플라티니에게 프리킥 결승골을 얻어맞고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한편 제3 대륙 팀들은 출전 티켓이 두 장으로 늘어나면서 이전보다 큰 희망을 품고 지역예선에 임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쿠웨이트전 패배로 인해 1차 예선에서 탈락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대한민국을 꺾은 쿠웨이트는 최종예선에서도 조 1위를 차지하며 사상 처음으로 본선에 올랐고, 플레이오프 끝에 중국을 따돌린 뉴질랜드 역시 쿠웨이트의 뒤를 이어 스페인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룹 대륙 티켓 예선참가국 본선진출국
1 유럽 2 서독,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핀란드 서독
오스트리아
2 유럽 2 벨기에, 프랑스, 아일랜드, 네덜란드, 키프러스 벨기에
프랑스
3 유럽 2 소련, 체코, 웨일즈, 아이슬란드, 터키 소련
체코
4 유럽 2 헝가리, 잉글랜드, 루마니아, 스위스, 노르웨이 헝가리
잉글랜드
5 유럽 2 유고, 이탈리아, 덴마크, 그리스, 룩셈부르크 유고
이탈리아
6 유럽 2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스웨덴, 포르투갈, 이스라엘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7 유럽 1 폴란드, 동독, 몰타 폴란드
8 남미 1 브라질, 볼리비아, 베네수엘라 브라질
9 남미 1 페루, 우루과이, 콜롬비아 페루
10 남미 1 칠레, 에콰도르, 파라과이 칠레
11 북중미 2 최종예선: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멕시코, 캐나다, 쿠바, 아이티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12 아프리카 2 최종: 알제리-나이지리아, 모로코-카메룬 알제리
카메룬
13 아시아•오세아니아 2 최종예선: 쿠웨이트, 뉴질랜드, 중국, 사우디 쿠웨이트
뉴질랜드

 

 

본선 요약

지난 1974년, 1978년 대회의 2차리그 제도가 유지됐지만, 본선 출전국이 24개국으로 늘어남에 따라 소폭의 변화가 일어났다. 일단 16개 팀을 4개 조로 나누어 진행하던 조별리그가 24개 팀·6개 조로 확장됐고, 2차리그의 경우 각 조 1위와 2위 12개 팀이 4개 조를 구성하여 풀리그 방식으로 경기를 치렀다. 최종 라운드에는 토너먼트 방식이 도입되어 한층 박진감을 고조시켰는데, 이는 4개 조 1위 팀이 준결승 토너먼트전을 치르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한편 이 대회는 개막 이전부터 지쿠소크라테스의 브라질, 마라도나켐페스의 아르헨티나, 루메니게의 서독, 플라티니의 프랑스 등이 정면충돌하는 ‘별들의 향연’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특히 이 중에서도 브라질은 70년대 내내 이어져 온 오랜 침묵을 깨고 막강 전력을 구축, 최강의 우승후보로 각광받고 있었다. 브라질을 제외한 다른 우승후보들이 초반 희생양으로 전락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전 대회 우승국 아르헨티나가 벨기에와의 개막전에서 0-1 충격패를 당한 것을 시작으로 유로 1980 챔피언 서독마저 알제리에 1-2로 무너지는 대형 사건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그 외에도 개최국 스페인은 처녀 출전국 온두라스와 1-1 무승부를, 유로 76을 제패했던 체코는 쿠웨이트와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에 반해 브라질의 초반 행보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펠레가 활약하던 시절 못지않게 화려한 공격축구를 선보인 브라질은 3승으로 가볍게 조별리그를 통과했음은 물론, 2차리그 첫 경기에서도 라이벌 아르헨티나를 3-1로 완파하며 그 막강함을 널리 인정받았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3무로 힘겹게 조별리그를 통과한 이탈리아가 브라질을 침몰시킬 것이라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최강 브라질을 무너뜨린 주인공은 이탈리아의 파올로 로시였다. 승부조작 스캔들에 연루되며 2년 간 자격정지 철퇴를 맞았던 로시는 제대로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해 조별리그 무득점에 그친 바 있었다. 그러나 로시는 브라질 전에서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해트트릭을 작렬시켰고, 이탈리아를 예상치 못한 3-2 승리로 이끌었다. 브라질 전 승리와 함께 기세를 올린 이탈리아는 준결승 및 결승에서 폴란드와 서독마저 무너뜨리고 통산 세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주요 선수

이탈리아의 파올로 로시는 이 대회부터 정식 수여되기 시작한 MVP(아디다스 골든볼) 및 득점왕(아디다스 골든슈) 타이틀을 모두 독식하며 별 중의 별로 떠올랐다. 로시는 최강 브라질을 해트트릭으로 무너뜨린 뒤 준결승과 결승전에서도 연거푸 득점포를 가동시키며 1982년 대회 후반부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로시에게 양질의 기회를 만들어 준 브루노 콘티, 거친 대인마크로 마라도나를 잠재운 클라우디오 젠틸레, 그리고 불혹의 골키퍼 디노 조프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이탈리아 우승의 공신들로 손꼽혔다.

 

반면 대회 전반부는 의심의 여지없이 브라질 선수들의 독무대였다. 특히 미드필드진에서 기막힌 콤비 플레이를 선보인 지쿠, 소크라테스, 팔카웅, 세레조 4인방은 ‘황금의 콰르테트(4인방)’이란 애칭으로 불리며 1982년 대회를 크게 강타했다. 이들과 함께 왼발잡이 스트라이커 에데르와 공격하는 수비수 주니오르까지 가세한 브라질 공격진의 화력은 1970년 대회 이상이라는 평가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서독의 칼-하인츠 루메니게는 대회 도중에 당한 부상에도 불구, 프랑스와의 준결승전에서 남다른 투혼 및 해결사적 기질을 선보여 축구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그러나 루메니게는 결승전에서 침묵했고, 결국 우승 타이틀, 득점왕, MVP 등 모든 부문에서 파올로 로씨의 뒤를 잇는 2인자에 머무르고 말았다. 프랑스의 미셸 플라티니 역시 4강에서 제동이 걸리며 2인자 그룹을 형성했으며, 디에고 마라도나의 경우 아직 미숙한 모습을 벗지 못해 한참 멀었다는 혹평을 받아야 했다.

 

 

수상 기록

MVP
1위 파올로 로시(이탈리아)
2위 팔카웅(브라질)
3위 칼-하인츠 루메니게(서독)

 

득점
1위 파올로 로시(이탈리아/6골)
2위 칼-하인츠 루메니게(서독/5골)
3위 지쿠(브라질/4골), 즈비그니에프 보니에크(폴란드/4골)

 

베스트 팀
골키퍼: 디노 조프(이탈리아).
수비수: 루이지뉴, 주니오르(이상 브라질), 클라우디오 젠틸레, 풀비오 콜로바티(이상 이탈리아).
미드필더: 팔카웅, 지쿠(이상 브라질), 미셸 플라티니(프랑스), 즈비그니에프 보니에크(폴란드).
공격수: 파올로 로씨(이탈리아), 칼-하인츠 루메니게(서독).

 

 

스페인 월드컵 이모저모

01

아디다스에 의해 월드컵 MVP 및 득점왕에게 정식 트로피가 수여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 월드컵 MVP는 기자단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선정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참고로 MVP에는 ‘아디다스 골든볼’이란 명칭이, 득점왕에는 ‘아디다스 골든슈’라는 명칭이 새롭게 붙여졌다. 첫 번째 수상의 영예는 MVP와 득점왕 모두 파올로 로씨(이탈리아)가 안았다.

02

유로 1980 우승국 서독의 알제리 전 패배는 1982년 대회의 최대 이변 중 하나였다. 특히 서독의 유프 데어발 감독은 “만약 알제리에 승리하지 못하면 경기 후 집으로 돌아가겠다” 는 경솔한 발언을 입에 담았다가 진짜로 패하는 바람에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03

서독을 격파한 당시 알제리 대표팀에는 자멜 지단(Djamel Zidane)이 활약하고 있었는데, 이 선수는 다름 아닌 지네딘 지단의 친삼촌이다.

04

처녀 출전국 알제리는 2승 1패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음에도 불구, 서독과 오스트리아에 득실차에서 밀려 3위로 탈락하는 분루를 삼켰다. 이러한 알제리의 탈락에는 서독과 오스트리아가 조별리그 최종전을 펼친 노골적인 ‘공생 작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05

당시 서독은 조별리그를 통과하기 위해 반드시 오스트리아를 꺾어야 했고, 오스트리아는 서독에 2점 차 이내로만 패배하면 무난히 2차리그로 향할 수 있었다. 서독의 흐루베쉬가 전반 10분 만에 선제골을 터뜨려 스코어가 1-0이 되자 양 팀 선수들은 공격을 진행하지 않고 볼만 돌리며 시간을 보냈다. 1-0 스코어를 유지하면 양 팀 모두 2차리그로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06

이에 스페인 홈 관중들은 경기장에 오물을 투척하며 서독과 오스트리아 선수들에게 ‘Fuera! Fuera!(나가라! 나가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서독 언론들 역시 “독일 축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경기였다” 고 대표팀을 강도 높게 비판했으며, 심지어 프랑스의 이달고 감독은 “서독과 오스트리아 선수들에게 노벨 평화상 트로피가 주어져야 한다” 며 이 경기를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07

결국 피파는 이러한 전철을 되밟지 않기 위해 조별리그 최종전을 동시간대에 진행시키는 새로운 규정을 도입해야 했다. 이 규정은 1986년 대회부터 적용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08

프랑스와 쿠웨이트의 경기에서 일어난 판정 논란 역시 이 대회의 대표적인 화젯거리 중 하나였다. 프랑스의 지레스는 후반 39분에 팀의 4번째 득점을 성공시켰음에도 불구, 주심에 의해 어처구니없는 취소 판정을 받았다. 스투파르 주심이 “관중들의 피리 소리를 선수들이 주심의 휘슬로 혼동해 플레이를 멈췄다”는 쿠웨이트 왕자 파하드의 항의를 받아들여 득점 판정을 번복해 버린 것이다.

09

멀쩡한 골을 취소당한 이달고 감독과 프랑스 선수들은 이 판정을 납득하지 못해 경기 기권을 고려하기까지 했다. 일각에서는 ‘오일쇼크’가 전 세계를 강타함에 따라 파하드 왕자의 주장을 거스를 수 없었다는 설까지 제기했다. 경기 후 스투파르 주심은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고, 파하드 왕자에게도 경고가 내려졌으며, 언론들은 월드컵의 권위 자체가 떨어졌다며 이 판정을 두고두고 비난했다.

10

한편 북아일랜드의 노먼 와이트사이드는 이 대회를 통해 펠레가 보유하고 있던 역대 최연소 출전 기록(17세 235일)을 갱신시켰다. 유고와의 조별리그 첫 경기에 모습을 드러낸 와이트사이드의 당시 나이는 정확히 17세 41일이었다.

11

최강 브라질의 이탈리아 전 패배에 이은 탈락은 이 대회 최대 이변이자 월드컵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대형 사건이었다. 브라질 미드필더 소크라테스는 이 패배를 ‘교통사고’에 비유했으며, 자국 내에서 2명이 자살하고 5명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안타까운 소식까지 들려왔다. 또한 브라질 내에서 ‘파올로 로시’는 한 동안 암묵적인 금지어로 통용됐다고 한다.

12

서독과 프랑스의 4강전은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승부차기에 의해 승패가 갈린 경기였다. 120분 동안 3-3 으로 승패를 가리지 못한 양 팀 선수들은 결국 승부차기로 돌입했고, 월드컵 역사상 첫 승부차기는 서독의 5-4 승리로 끝이 났다.

13

이 경기에서 서독의 골키퍼 슈마허는 골문을 향해 쇄도하던 프랑스 수비수 바티스통을 무릎 공격으로 쓰러뜨려 끔찍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바티스통은 슈마허의 공격에 이빨과 늑골이 부러지는 중상을 당했음에도 불구, 주심으로부터 반칙을 얻어내지 못했다. 플라티니는 이를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오심’에 비유하며 불만을 폭발시켰다.

14

이탈리아 대표팀의 주장이자 주전 골키퍼였던 디노 조프는 월드컵 역사상 최고령 우승 멤버로 이름을 올렸다. 당시 조프의 나이는 만으로 40세였으며, 이 기록은 아직까지 갱신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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